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하루를 살아가는 힘 - 운현스님

가람지기 | 2007.07.24 17:46 | 조회 3490

안녕하십니까? 대교반 운현입니다.

대중스님들께서는 아마도 이 넓은 도량가운데 나만의 공간, 추억이 담긴 장소가 누구나 한곳은 있을 것입니다. 삼장원, 서예실, 흐르는 물만 보고 있어도 더위가 가시는 이목소, 서점 뒤 등나무 의자, 못골가는 소나무길 등등... 생각해면 저에게도 가장 기억되는 곳, 생활에 변화를 준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김치광 입니다.

때는 바야흐로 사집가을, 반 스님 한명과 컨테이너를 들고 어스름한 김치광에 들어섰습니다. 순간, 갑자기 땅이 꺼지는 것이었습니다. 어찌할 사이도 없이 고꾸라지고 말았지요. 그 때만 해도 김치광에는 큰 김치통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여러 개 파져 있었습니다. 저는 들고 있던 컨테이너에 깔려 빈 김칫독에 한쪽 다리를 걸친 채 허우적 대던 순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반 스님은 한참을 웃더군요. 뒷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저 말고도 공포의 김칫독에 빠진 스님들이 몇이나 더 있다더군요. 실은 요즘도 어쩌다 김치광에 들어가게 되면 가슴이 두른 거리는 이유는 그 때의 그 기억 때문일 것 입니다.

여하튼 김치광에 빠져 발목을 삐어서 근 한 달을 법당에 가질 못했습니다. 웬 마장인가 싶더군요. 하지만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대중 스님들이 모두 법당에 간뒤 저는 홀로 관음전으로 향했습니다. 그냥 앉아만이라도 있을려구요. 발목이 점차로 호전되면서 한 배, 두 배 절을 시작하면선 그 계기로 인해 운문사에서의 절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대중스님들께서는 이 운문사에서 어떤 수행방법을 실천하며 생활하고 계십니까?

사경, 참선, 간경, 주력, 절 등 여러 가지 수행법이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개인적으로 절(拜)수행은 남을 공경하고 자기를 비우는 훌륭한 수행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절만 한다고 해서 성불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바른 이해 없는 절 수행은 그저 맹목저이며, 육체적인 운동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 법, 즉 중도 연기적 세계관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신심과 발심을 바탕으로 절을 할때 비로소 부처의 길로 한걸음씩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절 수행은 화두를 참구하면서도 할 수 있고, 염불·주력·사경·위빠사나 등과 병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몸과 마음을 같이 닦을 수 있다는 데 그 특생이 있습니다. 입으로 부처님 명호를 부르고 마음으로 끊임없이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참회하면 몸·입·마음으로 지은 업장이 점차 소멸되어 나아가 몸과 마음이 잘 다스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참회법이 동반된 절 수행의 형태는 6세기경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양대(507~557) 이후 많은 예참문이 만들어져 성행하였으며, 양나라와 백제는 교류가 활발했으므로 그 영향이 우리나라에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려 중기에는 천태종을 중흥한 원묘 요세국사의 ‘53불 예참’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묘종경>설법하기를 좋아하여 언변과 지혜가 막힘이 없었고, 여러 사람에게 권하여 참회 닦기를 간절하고 지극히 용맹스럽게 하여 매일 53불에게 열 두 번씩 예경하고, 비록 모진 추위와 무더운 더위하도 한 번도 게을리 한 일이 없으니, 승려들이 서참회라 불렀다』라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배불정책으로 인하여 이런 수행전통을 크게 발전시키지는 못했지만, 소외받고 억압받던 여성과 민중들 사이에서, 멸업참회와 기도 방편으로 절 수행이 이어져 왔습니다.

최근 조계종 포교원의<신도 수행의식 설문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요즘 불자들이 가장 자주 실천하는 수행으로 전체 조사 대상의 32.3%가 108배,3000배의 절 수행을 포함한 참회기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불자들 사이에서도 절 수행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처님을 예경하고 절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공덕을 <업보차별경>에서는 열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묘색신을 얻으며

두 번째는 말을 하면 사람들이 다 믿어주고

셋째는 누구를 만나도 두렵지 않으며

넷째는 신과 사람들이 잘 호념해 준다.

다섯째는 큰 위의를 갖추게 되며

여섯 번째는 온갖 사람들이 다 가까이 따르며

일곱 번째는 불보살님께서 호념해주고

여덟 번째는 큰 복의 보답을 갖추게 되며

아홉 번째는 명을 마친 뒤에 왕생하며

막지막 열 번째는 속히 삼매를 증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대중스님 여러분. 우리는 수행자입니다.

근원으로 돌아가면 길은 두 길이 아니나 방편으로 삼는 문은 많이 있습니다.

수행의 한 방편으로 부처님이나 보살에 대한 굳건한 믿음. 절하는 사람과 절을 받는 대상인 불보살이 둘이 아니라는 점을 굳게 믿고, 나를 위한 저이 아닌 남을 위해, 일체중생을 위해 참회하고 기도 수행하는 수행자가 돼 봄은 어떨까요?

언젠가 강사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새벽 예불 뒤 108배는 운문사에서 하루를 살아가는 힘이 된다구요. 참으로 그렇습니다. 절 수행을 통한 운문사의 하루하루, 항상 깨어있어 부처의 길로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어 나가는 수행자. 물론 이 말은 저 스스로에게 채찍을 가하는 말일 것입니다. 예불대참회문 중의 한 구절로써 법문을 마칠까 합니다.

제가 이제 발심하여 예배 하옴은 제 스스로 복 얻거나 천상에 나며

성문 연각 보살 지위 구함 아니요

오직 오직 최상승을 의지하옵고 아뇩다라보리심을 냄이오이다

원하옵나니 시방세계 모든 중생이

다 같이 무상보리 얻어지이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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