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참선의 열고개(선중스님)

운문사 | 2006.04.11 11:09 | 조회 3571

안녕하십니까? 화엄반 선중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릴 내용은 청담 큰스님의 선입문 중 “참선의 열고개”라는 정진과정에서 나타나는 수행자의 상태, 즉 지금부터 제시할 열 가지의 일여(一如)한 단계를 지나 성불하게 됨을 밝힐 텐데요. 각자 지금 내가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 살피며 들으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첫째는 송화두(誦話頭)입니다. 이것은 마치 염불 기도하듯이 입으로 화두를 암송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공부에 방해가 되므로 선방에 가서 보다는 이곳 강원에서 시간이 허락하는 한 계속 염송을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면 잠재의식에 화두가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하는 두 번째 염화두의 단계로 자연히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염화두에서는 화두가 마음에 잡히고 희미하나마 의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셋째는 주작화두(做作話頭)입니다. 새김을 할때에도 난자를 착실히 익혀야 본문해석이 수월해 지듯이 앞의 두단계를 정성스럽게 마쳤다면 여기서부터는 저절로 의정이 이루어지는 단계입니다. 다시말하면, 생사를 해탈하고야 말겠다고 작정한 마음이 물러나지 아니하므로 잘 되는 날이 점점 많아지게 됩니다. 참선의 3요소에 대분심이라는 것이 있지요?

우리 불가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예일지는 모르지만, 1960년대 일본 경제가 모든 분야에서 서구유럽에 뒤져 있을 때, 일본 기술자가 독일의 제철단지에 연수를 가게 됩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용광로의 온도가 과연 몇 도인지를 알려고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것이 핵실기술이었기에 아무도 온도를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분발심이 난 일본의 기술자는 용광로의 온도를 온 몸으로 느끼기 위해서 시뻘건 쇳물 속에 자신의 팔을 집어 넣었습니다. 일본 제철이 한때 세계 1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대분심으로 무장한 직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어른스님 중 한분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시면 끝에는 항상 何況爲僧일까보냐 라는 말씀을 자주하십니다. 이러한 대분심이 물러나지 않는 주작화두의 단계를 지나서 네번째 진의돈발(眞疑頓發)에 들어가게 됩니다


네 번째 진의돈발(眞疑頓發)에 들어가게 되면 홀연히 8만4천 번뇌망상이 다 끊어지고 화두에 대한 의심이 정말로 간절하여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딱 버티고 힘차게 앉아 있게 됩니다. 이것을 바로 좌선일여라고 하고 이 대목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이 바로 여러분 잘 아시는 절구통 수좌라는 별칭을 얻으신 효봉스님이겠지요.


다음으로 여섯 번째 동정일여(動靜一如)에 들어가게 되면, 기도 하거나 말을 할때 혹은 다음 사람과 말다툼을 할지라도 화두가 힘차게 나가게 됩니다. 이정도가 되면 비로소 내가 <7지보살>에 도달했구나 하시면 되겠습니다.

일찍이 성철스님께서는 출가 전에 이미 24세의 나이로 지리산 대원사에서 42일만에 동정일여라 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르셨다고 하구요, 1940년대 금강산 마하연에서는 시계에 맞춰 죽비를 치지 않고 오직 공양시간에만 방선을 했다고 하는데요. 한철을 같이 살아도 이야기하는 일이 없이 정진에만 몰두하셨고, 또 들어오면 결제요 나가면 해제였다고 하니, 이때에 이곳의 스님들은 다 7지 보살이 아니셨나 합니다.

그 다음이 일곱 번째 몽중일여(夢中一如)입니다. 비록 <동정일여>는 된다 하더라도 꿈을 꾸게 되면 화두는 간데 없고 번번히 딴 짓을 하고 있지요. 그럴수록 공부를 더욱 돈독히 힘써해서 꿈 속에서도 화두 의심이 있게 해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비로소 완전한 <몽중일여>가 되고, 8지보살의 지위에 들어가게 되지요.


여덟째 오매일여(寤寐一如)는 이와같이 비록 <몽중일여>는 되었다 할지라도 꿈도 없이 잠이 푹든 때에는 화두가 없어지고 마는데요, 잠에서 깨어나서 화두를 다시 챙기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들려 있는 것, 그것은 순전히 잠만 자는 것이 아니라 잠재의식 속에서는 화두를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능엄경에 보면 이 육신이라는 것은 진공의 무(無)가 변화된 환상(幻相)이라고 나오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몸은 본래부터 자고 깨고 하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존재라고 합니다. 이 화두의심이 돈독해져서 깊은 잠속에서도 화두가 성성적적(惺惺寂寂)한 지경에 이르면 불원간에 이 마음 자리가 탁 드러나서 생사를 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생사일여와 영겁일여 두 가지 단계인데요. 대오각성 후 중생제도의 단계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불가에서는 죽음을 단순히 죽는다라고 하지 않지요. 옷을 벗는다라고 합니다. 다만 앉아서 죽는 것을 좌탈입망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坐死라고 하지요. 공부를 완전히 마치고 나면 태어나고 죽는 것을 자유로이 할 수 있어서 병으로 죽지 않고 헌옷 벗듯이 아무 때고 마음대로 벗어버릴 수 있는데요. 즉, 다시 태어날 인연처에 자재하게 태어나 중생을 제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화엄경 서 첫부분에는 “왕복무제(往復無際)나 동정일원(動靜一源)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문장의 주에 “문수사리소설부사의불경계경” 가운데 선승천자가 문수보살에게 여쭈었습니다.

‘어떠한 것을 이름해 菩薩道를 닦는다고라 하닛고’ 문수보살께서 이르시되 ‘往이 있고 復이 있는 것을 이름하여 菩薩道를 닦는다고 하니 스스로 三昧에 들어감을 이름해 往이 됨이요,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삼매를 얻게 함이 復이며 스스로 성도를 행함이 往이 됨이요, 능히 일체범부를 교화함이 復이 됨이니라’하였습니다.


바로 열 번째 영겁일여가 되면 무량신통을 나투어 인연을 따라 무량중생을 제도하게 됩니다. 이렇게 나고 죽는 것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무상정각이라 하며 성불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이 참선법은 만약 정말로 억세고 성질 급한 사람이라면 길게는 九旬, 짧게는 7일이면 화두가 오매일여의 단계를 지나 영겁일여가 된다고 합니다.

기신론에서는 “중생과 부처는 동등하다. 왜냐하면 중생과 부처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면 중생이 아무리 수행하고 깨달아도 부처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하였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린 큰스님의 법문, 이 열단계의 공부는 혹시 이만하면 내 공부가 불조를 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자만심이 생겼을 때 반드시 참고해 보아야 할 중요한 나침반이 될 것 같이 법문으로 가름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옛 부처님 앞에 한 가지 十智에 오르기를 바라며 대중스님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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