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7가지 공식(효담스님)

운문사 | 2006.04.10 12:18 | 조회 3677

안녕하십니까? 사교반 효담입니다. 흔히 어른스님을 뵙고 인사를 드리면 “중노릇 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중노릇을 잘 하는 것인지요? 여기서 저는 중노릇을 고상하게‘깨달음으로 가기 위한 行’이라고 해석하겠습니다.수학공식처럼 정해진 식이 있어서 그 방식대로 한다면 어떨까요? 정해진 틀에서 선 안에서, 사각이든 삼각이든 원이든 그 모양에 식에 맞출 수만 있다면, 그것이 중노릇의 공식이라면 누구나 쉽게 깨달음을 구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그것을 수행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깨달음으로 가기 위해서는 분명 닦아가는 어떤 행이 필요합니다.


오늘 저는 깨달음으로 가기 위한 방편들은 많이 있지만, 가까이 실천할 수 있게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고 계신 티벳의 제 2의 부처로 추앙받는 쫑카파 스님의 『보리도차제론』을 읽고, 스님께서 제시하신 7가지의 디딤돌이 저희의 일상생활과 밀접히 맞닿아 있음에 대중스님들께 간략하게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예배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불을 올립니다. 예불할 때마다 우리들은 삼계의 대도사이고 사생의 자부이신 부처님께 지심으로 귀명합니다 하고 절을 합니다. 우리 모두가 낱낱이 부처라고 말은 하지만 먼저 부처를 이루신 분이고 나의 스승이시기에 예불을 올려 공경을 표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한껏 낮추어 보십시오.


둘째는 공양을 올리는 것입니다. 경에 말씀하시길 ‘옛날에 어떤 중생은 부처님께 칠전을 보시하고 죽어서는 전륜성왕이 되었는데, 하물며 허공을 다하고 부처님 세계에 가득하도록 귀한 보물을 보시하였으니 겁이 다하도록 생각하여도 미칠 수가 없으며, 수많은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여 그 마음을 헛되이 지내지 않는다면 그 복은 끝이 없으리라.’하셨습니다. 공양을 올릴 때는 아까워 하는 마음을 버리고 정성스런 마음으로 공양을 올려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동기로 인해 비록 이 생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하더라도 내생에는 삼악도에 태어나지 않게 되는 인을 만들어 결국 깨달음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가 수행자에게 가장 으뜸이 되는 공양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계율을 잘 지키고 수행 잘 해 가는 것이겠지요.


그 셋째는 참회하는 것입니다. 전생과 이 생에서도 깨닫지 못했고 지혜마저도 잃어버린 것은, 탐진치의 삼독에 의한 죄업 때문인데 이런 것을 없애고자 갈망한다면 분명 그는 참회를 해야 합니다. 진실한 참회는 큰 죄도 가볍게 할 수 있고 작은 죄들은 더 불어나지 않게 해 줍니다. 부처님 제자 앙굴리말라가 999 명의 목숨을 죽이고도 아라한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깊이 뉘우치는 마음으로 참회를 했기 때문입니다. 참회는 진실해야 합니다.


넷째, 수희입니다.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 그리고 중생들에 의한 선행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수희란 보살행의 실천이니, 다른 것과 비교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일으키는 마음의 기쁨이어야 하므로, 비록 어떤 사람이 거짓으로 공양을 올린다 할 지라도 그것을 비방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이 향 하나 피우는 것을 보고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수희의 방법에는 남의 덕행에 대해 수희하는 것과 이 생에 좋은 몸을 얻어 바른 종교를 믿고 공부를 하게 된 것들이 다 자기가 전생에 계율을 잘 지키고 보시를 즐겨하고 인욕의 수행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즉 자신의 전생과 이 생에 지은 덕행에 대해 추측하여 수희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설사 원수일지라도 그의 덕행에 대해 기뻐하면 질투와 시기가 사라지고 새로운 공덕이 생기게 됩니다.


다섯 번 째는 권청으로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청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게서도 처음 깨달음을 얻은 후 칠 일동안은 가르침을 베풀지 않으셨다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믿음과 권청에 의하여 가르침을 베풀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믿음과 권청에 의하여 가르침을 베풀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어디에서든지 법문 듣기를 좋아하고 또 청해야 합니다. 혹 옆 도반에게 바깥의 세상사 즐기는 이야기 하나를 들어도,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어도, 책을 보고도 우리는 불교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해서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겠습니다. 저는 그것이 도담(道談)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섯 번째는 부처님들이나 여러 보살들에게 일체 중생을 위해 열반에 들지 마시고 오래도록 세상에 머물러 주시기를 간청하는 것입니다. 불보살님들은 중생의 근기에 알맞은 도움을 주기위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시는데, 동물이나 귀신으로도 나타내신다고 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부처님도 알아보지 못하는데, 다른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신다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건 진정한 수행의 힘이 아니며 어렵겠습니다.


일곱 번째는 기원하는 것입니다. 기원을 할 때는 스스로의 공덕에 의지해야 하며 그것은 공덕을 잃지 않게 하는 길이기도 하고 행위는 또한 깨달음과 일체중생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과보보다는 일체중생들을 위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그래서 항상 자리이타입니다. 나만이 아닌 나로부터 시작해서 더불어 타인과 함께 회향하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모두 일곱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예배를 하면 자만심이 없어지고, 공양을 올리면 아까워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참회를 하면 탐진치 삼독이 없어지며, 수희를 행하면 질투심이 없어지고, 권청을 하면 바른 가르침에 대해 지은 죄를 없애게 되고, 불보살들께서 오래 사시길 원하면 부처님이나 스승께 지은 죄가 없어지며, 기원을 하면 깨달음에 나아가게 된다.


스님들의 하루 생활의식이 앞에 말씀드린 일곱 가지에서 하나도 빠지는 것이 없습니다. 꾸준하게 반복적으로 평범하고 단순하고 특별하지도 않은 하루의 일상사를 잘 행하면 자동으로 중노릇은 될 것이며 점점 나아가 깨달음에 가까워 질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이론적으로는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로 잘 알고 있습니다.


능엄경에서는 말씀하십니다. “지금 수행하는 사람이 올바른 것을 좋아하면서도 사특하고, 청결하고자 하면서도 오염되며, 가르치지 아니해도 잘하고 바라지 아니한대도 하게 되는 것이, 은연중에 채찍을 가하는 것과 같아서 스스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은 숙세의 업습에 끌려 다니기 때문이다. 덕이 높아도 복이 낮고, 선을 행하는데도 몸이 흉하여 장애가 많고 원수가 많으며, 자주 병들고 자주 괴로운 것이 마치 실과 같이 끊임없이 이어져 짜여진 것과 같으니, 스스로 풀 수 없는 것은 숙세의 업습으로 불러 들였기 때문이니라.”하루 일상생활을 통해서 수행을 하다보면 숙세의 업습도 분명 녹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느 스님의 진정한 출가에 대한 정의를 끝으로 두서없는 법문을 마칠까 합니다.“우리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것은 나태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의 유희에 너무 깊이 빠져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깨어있는 상태로 되돌리려고 애쓰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출가는 단순히 돈과 같은 외적 소유물들을 포기하거나 집과 가정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좋아하는 생각, 즐거웠던 추억, 희망, 공상, 마음 속의 모든 속삭임 까지도 완전히 포기할 수 있는 것이며, 이 모든 것들을 비워내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진정한 출가입니다.”대중스님들 !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부처를 이루겠다는 믿음 하나로 만난 우리들입니다. 사람 몸 받았을 때 올바른 중노릇으로 다함께 성불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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