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기도의 힘 (형진스님)

운문사 | 2006.04.10 12:27 | 조회 3309

안녕하십니까? 화엄반 형진입니다.

대중스님들께서는 수행자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육도만행의 자취와 기도정진으로 온몸에서 베어 나오는 맑은 수행자의 향기가 아닐까 합니다.

“정성이 지극하니 고달픈 줄 모르고

구하는 생각이 간절하니 소원을 이루었도다.”

[선종결의집]에서 단운 지철스님은 부처님께 예배하기도 싫고, 도를 닦기도 싫고, 선지식을 친견하기도 싫고, 도우를 가까이 하기도 싫으며, 그저 제 마음대로 방탕하고픈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숙세의 업장은 깊고, 선근이 미약하기 때문이니 이러한 때는 불보살님 전에 나아가 발로참회하고 도와주실 것을 간절히 발원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위에는 많은 학인들이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저마다의 개성이 다른지라 기도의 유형 역시 다양한데요. 잠시 살펴보면, 먼저 기도와 생활이 하나인 유형입니다. 기도의 힘으로 손짓 발짓 하나하나 절제되고 단정하여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환희심이 나게 하고 주위까지 신심으로 물들이는 학인입니다.

두 번째는 기도와 생활이 철저히 분리된 따로국밥형. 기도할 때는 자비심으로 충만하지만 일단 현실로 돌아와서는 본지풍광 그대로를 드러내고 마는 유형인데요. 도대체 저 사람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법당에서 간절히 기도를 올리고 있던 그 스님이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세 번째는 괴로운 현실에서 도망쳐 기도라도 잡고 있어야하는 현실도피형입니다. 물론 기도를 하면 들떠 있던 마음이 안정되어 마음의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기도를 한다면 기도는 우리에게 일시적인 안정제 역할 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용두사미형입니다. 남들이 하고 있는 이 기도, 저 기도를 따라 거창하게 시작은 하나 막상 회향은 하지 못하는 유형이지요.


대중스님! 스님의 기도는 어떤 유형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기도를 하고 있느냐 못지않게 그 마음가짐 역시 중요한데요. 초심에서 목우자 스님은 “기도할 때 모름지기 자신의 죄장이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은 줄 알아서, 이참과 사참으로 녹여 없애야 할 줄 알며, 예배하는 나와 예배 받는 부처님이 다 진성으로부터 연기한 것인 줄 깊이 관하며, 지극히 참회하면 감응이 헛되지 않는 것이 마치 메아리가 울리듯, 그림자가 따르듯 하는 줄 깊이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라는 것은 자신의 숙세의 업장을 참회하고 현재의 바른 수행을 통해 미래의 성불로 향하는 길입니다. 불보살님의 대자비력을 빌려 내 안에 부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바쁜 강원의 일상 속에서, 특히 하반 때는 기도 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도라는 것이 누구에게는 1분이면 충분하고, 누구에게는 하루 24시간을 해도 모자란다고 합니다. 결국 기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지극하고 간절한 마음이면 충분합니다.


잠시 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북대암 4번 보기” 치문 첫 철에 들었던 이 말은 겨울에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북대암을 4번, 즉 겨울을 4번 지내고나면 졸업을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윤달이라 유난히 춥고 길었던 치문 첫 철. 이 말을 듣자마자 운문사에서의 제 목표는 “북대암 4번 보기”가 되었습니다. ‘경전공부’나 ‘대중 속에서 먹물들이기’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저의 강원생활은 자연히 겉돌기 시작했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바빠야 하는 치문과 「서장」이나 「선요」보다도 호미와 콘테이너가 더 중요했던 사집. 전 끊임없이 불만스러웠고 의미없이 힘들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사교. 경반이 되었다는 흥분이 채 식기도 전에 밀려온 또 다른 경계. 다름아닌 수업시간의 졸음이었습니다. 안 먹는 커피도 마셔보고, 수업시간에 끊임없이 먹어도 봤지만 결과는 언제나 혼침... 행복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강원의 현실에 충실하기 보다는 각가지 엽기적인 행각으로 반들을 괴롭혔고, 그것을 은근히 즐겼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공허해지고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불안감은 커졌습니다.


‘이보다 더 무의미할 순 없다’는 식의 강원생활에서 제가 찾은 것은 바로 기도.

관세음보살님 앞에 나아가면 그 어떤 때보다도 편안하고 행복했습니다. 더 이상 현실의 괴로움을 감추기 위해 내 자신을 포장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시작한 저의 기도는 서서히 제 자신을 변화시켰습니다. 내 자신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밖으로만 향했던 시선이 조금씩 내 안으로 돌려졌습니다. 결국 그동안 나를 끝없이 힘들게 하고 괴롭혔던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 북대암을 한번만 보면 졸업입니다. 고지가 바로 코앞인 지금. 제 목표는 여전히 “북대암 4번보기”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예전의 그 의미는 아닙니다. 일생에 한번 뿐인 4년의 강원생활. “북대암 4번 보기”는 바로 아름다운 회향의 의미입니다.


눈이 크면 눈물이 많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보시다시피 눈이 크지도 않은데 기도할 때면 유난히 눈물이 많이 납니다. 한 도반은 그건 자신에 대한 연민의 눈물일 뿐이라고 핀잔을 줍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건 업장이 지극히 두터운 제 자신에 대한 참회의 눈물임을. 그리고 어리석은 제게 뒤늦게나마 소중한 한 가지를 일깨워준 인연에 대한 감사의 눈물임을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얀 도화지에 어떤 그림을 그릴지는 온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본래 하얗던 도화지가 혹 전생의 습기로 얼룩이 졌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이생에 잘못 그린 그림으로 도화지가 엉망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기도의 힘은 불가사의 합니다. 참회기도로 다생겁의 업장을 녹여 본래 텅 비고 깨끗했던 도화지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자신이 살고 싶은 삶, 진정 원하는 삶을 하나씩 그려 나가면 됩니다.


올곧은 수행자, 자비로운 수행자, 맑고 향기로운 수행자...

지금 당장 원하는 모양의 그림을 그려 넣으십시오. 그리고 그 그림이 제대로 완성되길 기도하십시오. 분명 참된 기도의 원력으로 화장세계를 장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자대비하신 불보살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합장한 두 손.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입니다.


대중스님! 기필코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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