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덕인스님)

운문사 | 2006.04.10 12:33 | 조회 3659

이 몸이 나기 전에 그 무엇이 내 몸이며 세상에 태어난 뒤 내가 과연 뉘기런가, 나~무 아미타불’안녕하십니까. 사교반 덕인입니다. 누구에게나 제일 소중한 존재는‘나자신'이며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은‘내가 존재한다’라는 관념이 아닐까 합니다.

경험론자 데카르트는 철학적 문제들을 고심고심하다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의심하고 부정할 수 있지만 이렇게 회의하고 있는 그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가 없었기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제일 명제를 남겼습니다. 그의 명제는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로 바뀌어야 한다는 농담 섞인 비판이 종종 따르기도 하는데요, 머리에 손을 얹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 데카르트를 마주한 듯, 저는 그의 고충을 이해할 것도 같습니다.

대중스님들은 어떠십니까? 나는 엄연히 존재합니까? 제가 처음으로 ‘아! 난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라고 쇼크를 먹은 일은 고등학교 지구과학 시간으로 거슬러갑니다. 선생님은 평소의 무덤덤한 목소리 그대로 태양계의 구조며 지구와 태양간의 거리, 은하계, 빅뱅이론 기타 등등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모두 다 아시다시피 빛은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돌지요. 한 찰나에 900생멸을 하는 우리 마음에 비하면 신통찮은 것 같기도하지만요, 이 엄청난 빛의 속도를 따라가면 우리는 지구에서 태양까지 8분 13초면 도달 할 수 있답니다.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을 지나 태양계를 완전히 벗어나는 데는 두·세시간이면 충분합니다. 잠시 지구과학 공부를 조금 더 해 볼까요.

태양계는 천억개의 별들과 함께 ‘우리은하’를 이루고 있고, 우리 은하와 같은 것이 약 1조개가 더 있습니다. 우리 은하의 직경은 약 10만 광년인데요, 광년이란 光波가 일년 동안 가는 거리를 말합니다. 우리은하 하나만 살펴보더라도 빛의 속도로 10만년을 간다니 엄청나지 않습니까? 더 놀라운 것은, 약 일조개의 은하를 뭉쳐놓은 것과 같은 것이 또 수천개 더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최첨단 과학도 우주의 끝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볼 수가 없겠지요. 다만 150억 광년의 넓이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한 찰나에 500생멸을 하는 우리의 초고속의식으로 한 줄기 빛을 따라 150억 광년의 우주 속으로 날아가는 상상을 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반나절을 미처 다 갈 필요도 없이 그 빛이 도달한 자리에 서서, 지구를 뒤돌아 보십시요. 먼지보다 작은 지구에 60억 인구는 어디에다 점찍을 것이며, 그 곳에 발붙이고 생활하는 나는 도대체 어디쯤에 있습니까.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다음으론, 제가 출가를 진지하게 고민할 무렵의 생각들입니다. 대체로 경험해 보셨듯이 그때는 세상고민을 혼자 다 짊어진 것 같지요. 20년 넘게 아무 의심없이 당연시되었던 ‘나’라는 존재가 어느날 생겨난 물건을 처음 마주한 것 처럼 이상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나라는 존재가 이렇게 있는것일까. 나라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없을 수도 있었는데 우연히 생긴 것일까’이런 의문을 한동안 품고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만약 교통사고로 팔하나·다리하나를 잃는다고 해서 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 팔다리는 내가 아니고, 성형수술을 밥 먹듯이 하는 세상에서 이 얼굴 또한 내가 아니고, 깊이 잠 잘때는 아무 생각도 없지만 잠에서 깨면 나는 또 여전하니 생각 또한 내가 아니고, 뇌사상태에 빠진 사람도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경우가 있으므로 뇌의 작용도 내가 아니고, 그러면 나만의 고유한 성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곰곰이 생각할 수록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 육신이란 내것이라고 주장할 수 만은 없는 자연의 요소들이 잠시 모인 것이고, 나의 가치관, 생각, 느낌 등이라는 것은 어릴적부터 받아온 교육환경, 관습, 문화, 여러 사상체계 등 무수한 요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나만의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평소의 나라고 느끼고 있는 그것은 가짜일지도 모르고 진정 내자신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너무 오래 살았다는 기특한 생각을 하고서 이렇게 출가사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수행자의 겉모습만 바꾸었지 현실이라는 왕국에서 ‘나’란 놈은 기꺼이 왕의 자리를 물러난 적은 없었습니다. 부끄럽게도 모든 평가의 잣대는 오직 ‘나’였습니다. 나라고 알고있는 그 놈은 깊은 잠에 빠진 상태를 빼고는 언제나 我相의 견고한 땅위에서 웃고, 이야기하며, 걸어다녔습니다.

대중스님께서는 어떠하십니까? 얼마나 견고한, 나만의 실체를 지니고 계십니까? 금강경 구경무아분에서는,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나와 법 없음을 막힘없이 환히 통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길 이름하여 참으로 보살이라 할 것이니라”하셨습니다. 우리는 부처님경전이나 조사스님들의 어록을 통하여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法無我, 人無我 혹은 假我니 眞我니 하는 말씀을 듣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고구정녕하신 말씀들을 얼만큼 나의 것으로 소화시키고 실행하려고 하느냐하는 것이겠지요.

우주의 눈으로 보면 육신의 나란 잠시 공중에 부유하는 먼지 하나와 다를 바 없고, 불성의 차원에서의 나란 삼천대천세계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이지요. ‘내’가 本來是佛이라는 가르침을 가슴깊이 새길진되,‘너’ 또한 온갖 공덕을 갖춘 부처님이 틀림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내가 정녕 둘이 아니기에 無我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우리 모두는 우주라는 거대한 인드라망의 그물코에 꿰어진 한 알의 구슬입니다. 불성의 빛을 간직한 그 한 알의 구슬에는 또 수천수만의 다른 구슬들이 영롱하게 비치고 있지요. 이렇듯이 내가 진정 무엇인지를 깊이 통찰하는 자세에서 나와 너, 나와 자연, 나와 우주와의 깊은 상호관계를 바르게 알아갈 수 있지않을까요.

며칠을 끙끙 앓으면서 차례법문 내용을 준비하는 동안 금강경오가해 수업시간에 가슴에 크게 와 닿았던 人我相에 대한 함허스님의 설의를 인용하면서 두서없는 저의 말씀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法에는 彼此가 없거늘 견해에는 我相과 人相을 일으키니 아상과 인상이 있음으로 인하여 업을 일으키고 죄를 짓는것이로다. 죄업이 형상을 이루어서 보리의 길을 장애하니 보리를 이루고자 하면, 먼저 죄업을 없애야하고 죄업을 없애고자하면, 먼저 아상과 인상을 끊어야 함이니, 만약 경을 듣고서 뜻을 알아 무아의 이치를 통달하고 또한 무아의 행을 수행해서 다시는 생사의 업을 짓지 않으면 곧 죄의 뿌리가 영원히 없어진 까닭으로 비록 선세의 무량한 죄업이 있다할지라도 곧 봄날에 얼음이 녹고 기와가 풀리는 것 같이 마땅히 위없는 부처님의 과보인 깨달음을 이루느니라”

대중스님! 부디 무아의 이치를 통달하시고 무아의 행을 수행하시어 대자유인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불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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