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중도의 원융한 눈으로 바라보면-동원스님(화엄반)

운문사 | 2006.06.12 17:02 | 조회 2906

어느날 한 보살님이 이렇게 물어옵니다.

“스님, 극락은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어디서는 부처님은 ‘극락에 가기위해서는 착한 일을 많이 해라’하고,

또 어디서는 ‘백천 만년 선행을 닦더라도 극락에 갈 수없다.

극락은 존재하지 않으니까’라고 하시는데, 도대체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안녕하십니까? 화엄반 동원입니다.

대중스님들은 이러한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극락은 연기로서 존재할 뿐, 방편으로서 있다, 없다라고 施設할 뿐이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답일 것입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말은 모두 방편으로 施設한 것이라, 하나도 취할 것이 없다. 취해 집착하면 바로 邪道에 떨어지나니라”

한때, 저는 방편에 떨어져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알던 바로는 3아승지겁의 선행을 닦아야 성불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書藏에는 소를 잡던 광액도아가 그 자리에서 성불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아무런 수행의 과정없이도 한 마음만 밝히면 살인자도 성불할 수 있단 말인가?

성불의 기준, 조건은 무엇일까? 닦으란 말인가, 말란 말인가?


그런던 중, 보조스님의 글을 보다가 이런 글귀가 눈에 들어옵니다.

“3아승지겁을 닦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학자들은 퇴굴심을 내기 쉬우므로 頓悟의 처방을 주고, 나는 이미 부처라고 생각하는 선학자들은 스스로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여 수행을 게을리하기 쉬우므로 漸修의 처방을 준다.”

사람의 근기에 따라 방편으로 시설한 것을 법에 차별이 있지않나하고 혼란스러워했던 것입니다. 사람의 근기는 차별되지만, 모두에게 佛性이 있다는 점에서 평등한 것처럼, 방편의 말은 차별되지만 뜻에 있어서는 평등한 것인데 말입니다.

더 나아가 삼라만상을 차별되지만, 모두 연기적 존재라는 점에서 평등합니다.

우리는 압니다. 알면서도 왜 쉽게 차별된 그 말에 떨어져 버리는 것일까요?

부처님께서 중도를 설하셨듯이, 평등성, 차별성 그 어디에도 치우쳐서는 안 되는데, 습관처럼 차별성에 치우쳐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난 강원시절, 저는‘수행에 있어서 도반은 전부다’는 말에 집착해서 ‘괜찮은 도반 어디 없나?’하고 제 자신은 보지도 않고, 바깥의 64명의 도반스님 각각의 차별된 모습만 보고서 시비분별했습니다. 그러고는 실다운 모습을 본 것인냥 집착해서 親疎의 마음도 내었습니다. 그랬더니, 스스로 괴롭더라구요.‘머리깎은 중이 이 뭐하는 일인가’싶었습니다.


화엄이 된 지금, 물론 아직도 시비합니다.

하지만 이젠, 차별되지만 평등한 저를 비롯한 65명 모두 각 각 무애함을 觀하고, 觀하고자 노력합니다.

또한 방편의 차별된 말에 치우쳐 버리는 것은, 서울가는 방편은 여러 가지인데, 차별된 어느하나를 고집해서 집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KTX가 되었든, 버스가 되었든, 또 혹은 걸어서 가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도착할 수 있습니다.


화엄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큰 바다는 차별된 백 개의 강물을 거두어들여 하나의 맛을 이루지만, 백 개의 강물은 결코 바다를 받아들일 수 없다.’

차별성, 평등성 그 어디에도 치우침이 없이 觀하는것, 곧 중도의 원융한 눈으로 바라보면, 事事無碍한 두두물물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치우친 눈으로 바라보면 결코 두두물물을 바로 볼 수 없겠지요.


그런데 우습게도 방편의 차별성에 떨어지는 것을 경계하는 법문을 하면서, 또 저는 사사무애라는 방편에 떨어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저에게 도반스님은 말합니다.

‘實參이 함께 되어야지. 언제까지 머리로 셋팅만 할꺼야.’

2%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대중스님 여러분!

화엄경을 보고 있는 지금 저의 분상에서는 차별성, 평등성 어디에도 치우침이 없이 사사무애의 눈으로 一切法을 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本來面目 찾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방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매력적인 이 길을 함께 가는 대중스님!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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