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당신은 몇분짜리 부처님입니까? (보선스님)

운문사 | 2006.04.10 12:46 | 조회 3020

안녕하십니까? 화엄반 계季씨(막내) 보선입니다. 저를 제외한 반스님 모두 이 시간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이유는 저의 차례법문은 곧 졸업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막상 이 자리에 올라와보니 생각보다 많이 떨리네요.


불가에서 가장 많이 쓰는 인사는 “성불하십시요”입니다. 성불.. 바로 ‘부처님 되시라’는 말인데요. 우리는 다른 생각, 다른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부처님 되려고, 부처님 닮아가려고 이렇게 삭발염의하고, 성불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언젠가 반스님 독서대에 붙여진 세구절을 보고 한참을 그 자리에서 서성였던 기억이 납니다.

“하루종일 부처님 매일매일 부처님 오래오래 부처님”

단지 3구절에 지나지 않은 짧은 글귀였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는데요. 하루 24시간 중 단 3분이라도 마음을 부처님처럼 쓸 수 있다면, 그 사람은 ‘3분짜리 부처’가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대중스님들께서는 과연 하루 가운데 몇 분이나 부처님의 마음을 쓰십니까? 또 무엇을 성불이라 생각하고, 그 성불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행을 하십니까? 혹시 성불이라는 것을 사막의 신기루처럼 아득하게만 느끼고 계시진 않습니까? 아니면 로또복권에 당첨되듯 어느 순간 우리에게 떡--하고 안길거라 꿈꾸고 계시진 않습니까?


새로운 환경에 첫발을 내딛는 치문반 시절. 그때는 모든 게 낯설기만 하지요. 그래서 오랜 시간 상반스님들이 만들어 놓은 틀 속에서 똑같이 찍혀 나오는 붕어빵 모습이 됩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가치관이 정지된 채 오직 할 뿐이지요. 목련나무를 90도로 꺽으라 하니 굳이 먼 길을 돌아 꺽어 다닙니다. 차수를 하라고 하니 뛸 때에도 차수를 하고 뜁니다. 下心 에 또 下心...


하지만 사집이 되면 조금씩 변화는 시작됩니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개선장군인양 씩씩하게 운력차림으로 도량을 활보합니다. 그동안 눌러 놓았던 생각이나 판단들이 서서히 고개를 듭니다. 보이지 않았던 반 스님의 잘잘못이 보이고, 갖가지 시시비비들이 일어납니다. 거기에 나태함까지 발동됩니다.


사교가 되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상밙이라는 상이 더해질 뿐이지요. 모든 상을 버려야 한다는 금강경의 말씀은 오직 경전에만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는 점점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모습이 됩니다. 이제껏 꽁꽁 묶어 두었던 본지풍광을 여실히 드러내면서 말입니다. 부처님 되고자, 부처님 닮아가려 조석으로 ‘지심귀명례’를 하는 우리들. 성불을 향한 우리의 수행은 마치 메마른 강바닥에 그물을 던지는 격이지요. 부처님은 오직 법당에만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해를 두고 변하고 있었고, 화엄은 자유로운 가운데 각자의 삶에 충실하는, 다분히 개인적인 면이 도드라집니다. 강원은 막 발심한 수행자들의 공동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만의 울타리를 하나씩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경전공부, 자기 기도, 마음에 맞는 도반 등에 치우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부처님의 마음을 쓰는 이야기가 있어 소개할까 합니다. 얼마 전의 일입니다. 저녁 입선시간에 후원을 지나치다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습니다. “스님, 뭐하세요?” 반스님은 대답 대신 그냥 웃기만 했습니다. 설현당으로 돌아온 저는 입선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방선시간이 되어 그 스님은 차관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생강차예요. 감기 걸린 스님들! 뜨거울 때 드세요.” 한참 독감이 돌고 있을때라 여기저기서 감기환자들이 차관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한 차관 가득했던 생강차는 금새 바닥을 드러냈고, 생강차를 마신 반스님들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졸업여행 때의 일입니다. 다들 떠날 때의 설레임과 부푼 기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온통 기름을 두른 음식들, 10시간이 넘는 버스에서의 좌석여행. 우리는 점점 지쳐갔습니다. 신경은 날로 예민해졌고, 설사병에 감기환자까지 늘었습니다. 다들 자신의 몸을 챙기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늦은 밤 감기약과 지사제를 손수 챙겨 각방을 찾아다니는 그 스님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 눈에 비친 그 스님의 모습은 바로 부처님이었습니다. 물론 매일 법당에서 우러러보던 금빛 찬란한 부처님의 모습은 아닙니다. 모든 이들이 존경하는 고매한 큰스승의 모습도 아니었지만, 분명 부처님이었습니다.


대중스님!‘성불’이라 하면, 선방에서 가부좌를 틀고 화두를 참구하다 어느 날 어느 때에 뻥!하고 나타날 오색찬란한 세계를 떠올리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학인이니까, 여기는 강원이니까...하면서 갖가지 시비에 얽히는 것이 본분사요, 성불이란 졸업 후 선방에 가서나 생각해 볼 과제로 여기지는 않습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요. 현재를 떠난 미래는 있을 수 없습니다. 성불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지금 이 순간 성불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미래에는 성불할 것이라고 장담하십니까? 분명 성불은 현재의 문제이지, 미래의 것은 아닙니다. 성불을 미래의 것으로 미룬다면, 우리는 결코 살아있는 현재에는 성불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강원 학인으로서의 성불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이런 스님들을 통해 성불을 봅니다.

새벽입선시간에 졸음을 쫓아가며 독송을 하는 스님,

맛있는 된장국을 끓이기 위해 도량석이 올라가기도 전에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스님,

정랑에서 물과 휴지를 아껴 쓰는 스님,

귀찮더라도 분리수거를 잘하는 스님,

108배 만이라도 열심히 해보겠다며 한 배 한 배 정성을 기울이는 스님 등등


자신의 자리에서 조그만 일을 묵묵히 해 나가는 모습. 자신보다 남을 먼저 배려할 줄 아는 마음. 바로 부처님의 모습 아닐까요? 법은 입에 있지 않고, 아는 것을 행하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사소해 보이는 것을 소중히 여기며 하나 하나를 실천해가는 스님들의 성불은 그다지 먼 곳에 있지 않음을 말입니다. 졸업을 앞둔 지금. 저는 무사히 4년을 회향함에 모든 인연들께 감사할 줄 알고, 한 달 남짓한 기간동안 예불자리, 공양자리를 잘 지켜가면서 자그마한 일들을 소중히 지어갈 것을 생각해 봅니다. 이것이 저의 성불입니다.


성불을 꿈꾸는 대중스님! 하루 5분이라도 좋으니 부처님 마음 쓰는 일에 집중해 보십시요.

5분에서 5분, 10분, 15분 이렇게 나날이 애쓰다보면 하루 종일 부처님 되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매일매일 부처님이 될 것이고, 오래오래 부처님이 될 것입니다.


진실로 성불을 꿈꾸는 대중스님!

부디 성불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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