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칭찬합시다 (영빈스님)

운문사 | 2005.12.26 13:38 | 조회 2715

오랜만에 가을을 느끼려 차를 다렸습니다.

차 그릇으로는 냉면그릇입니다.

녹차를 넣었습니다.

둥둥 떠 있던 찻잎들이 조금씩 가라앉았습니다.

찻잎에 물이 들고 물에 찻잎이 스며 나왔습니다.

몇 잎은 수면에 무늬를 놓고, 분위기가 절정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닮은 듯, 닮은 꼴 차 한 잔에 가을을 느껴봅니다.


안녕하십니까. 치문반 영빈입니다.

마냥 좋기만 하고 온 세상이 내 세상일거라고 부푼 꿈을 안고 강원에 들어와 그런 것들에 숨돌릴 틈도 없이 한 철이 지나고, 그 즈음 “다 좋다. 내 무슨 복에 저렇게 좋은 사람들과 이 좋은 도량에서 공부할 수 있는 걸까?” 의구심을 갖고, “부처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제 모습은 어느 순간인가 날카로운 시비의 눈빛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 시비, 시비 속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했습니다.

분명 이 마음은 둘이 아니라고 했는데 감사와 환희의 마음은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버렸습니다.

불교는 마음의 마음에 대한 종교라 하고, 이러한 마음은 미묘해서 파악하기 어려우며 외계를 낱낱이 인식해 기억하고 그것을 객관화하는 힘이 있어 엄청난 사악함을 발하기도 한다 합니다.

여기 「선가귀감」의 한 구절을 들어보겠습니다.


有一物於此하니 從本以來로 昭昭靈靈하야 不曾生不曾滅이며 名不得狀不得이로다.

여기 한 물건이 있으니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서

일찍이 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다.


하지만 저는 억지로 모양을 한 번 그려보았습니다.

제가 그린 마음은 바람이 완전히 꽉찬 고무풍선입니다. 외부자극에 항상 민감하게 반응하고, 때론 자극이 오기도 전에 먼저 마음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항상 산만해서 붕붕 떠다니기도 하고요. 그런데 어른스님들의 마음은 바람이 어느 정도 빠진 고무풍선이라고 할까요. 밑이 널찍해서 웬만한 바람에는 움직이지도 않는 듯하고 누가 뭐래도 꿈쩍도 하지 않고 항상 묵묵해서 굴려도 잘 구르지도 않는 듯 했습니다. 마음을 찾아간다는 것은 이러한 고무풍선의 바람빼는 작업이 아닐까요?

바람이 빠지면 빠질수록 외부의 자극에 무심해지고 쉽게 동하지도 않고 굳건하게 한 자리를 고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고무풍선의 바람은 어떻게 하면 뺄 수 있을까요?

엉덩이로 깔고 않으면 일순간에 빠지겠지만 전생에 풍선을 터뜨릴만한 연을 짓지 않았으면 스스로 서서히 빠져나가기로 할 수밖에요. 구르고 주무르고 또 굴려서, 아님 옆에 다른 풍선들과의 부딪침으로 해서 조금씩 조금씩 빠져나갈 것입니다. 이 과정이 업장소멸의 과정이겠지요. 업이 소멸되고 청정해지면 定으로 바로 갈 수 있지 않을까요.

바람 빼는 작업!

수행 중에 참선을 최고로 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대중에서 할 수 있는 참 수행법이 무엇일까 하고 고민해 봅니다. 그것으로 한 가지 이런 실천수행을 제시해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둘 이상만 모여도 남의 얘기로 날 새는 줄 모릅니다. 아니, 나 혼자만 있어도 머리로는 갖가지의 시비와 험담에 지쳐있다가 “왜 이러지”라고 나 자신을 일깨워보기도 합니다. 분명 이건 아닌데, 아닌데 하면서요. 이렇게 다른 이의 장점보다는 단점들이 눈에 띌 때 그 단점들이 다 나의 허물이구나 생각하고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선지식으로 삼고 또한 그 사람의 장점을 보고자 노력한다면 아니 노력으로만 그치지 말고 “스님, 스님은 이런 모습이 참 좋아요”라고 적극적인 표현을 한다면 자신에게는 여유를, 다른 스님들과의 관계는 좀 더 부드러워지지 않을까요.

쉬운 듯한데 남을 칭찬한다는 것, 긍정적인 사고로 바라본다는 것은 참 어려운 실천인 것 같습니다. 칭찬이 어떤 현상을 일으켰는지 일상생활에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외아들을 키우는 어떤 한 어머니는 아들을 키우는 재미로 살았습니다. 고2가 되자 나쁜 길로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돈을 훔치고 외박하고 싸움질에, 걸핏하면 경찰서에서 데리고와야 했습니다. 절망 속에서 스님을 찾아 의논드렸습니다. 오늘 밤부터 백일 동안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꼭 기도 끝에 아들의 잘한 점을 기록하는 칭찬일기를 써보라 했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막상 기도는 시작했지만 한심한 아들에 대한 칭찬거리가 없었는데, 그날은 집에 들어와서 잤습니다. 이건 분명 들어오지 않은 것보다는 나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기록하고, 다음날도

‘오늘은 경찰서에서 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은 아들이 아침에 밥을 한 그릇 다 먹고 갔다’

이렇게 매일 기도하고 칭찬일기를 쓰다보니 온갖 칭찬 투성이고 마음이 푸근해지면서 아들의 어떤 모습도 사랑의 미소로 대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를 다해갈 즈음 아들은 어머니 앞에 참회하고 열심히 공부했다고 합니다. 칭찬 속에 얼굴이 바뀐 것이고 자애로운 얼굴을 대한 아들은 무언지 모르는 맺힌 마음을 풀고 어머니에게 온 것입니다.


아직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제자신도 눈이 어려서 대중스님의, 도반스님의 칭찬거리가 딱히 들기 부끄럽습니다.

대중스님,

우리는 모두 부처가 되고자 모였습니다. 부처님을 닮고자 모였습니다. 부처님의 말씀과 행동을 배워 밖으로는 밥을 빌고 안으로는 법을 구하는 수행자입니다.


1초 동안 부처같이 생각하면 1초짜리 부처요

1분 동안 부처같이 말하면 1분짜리 부처요

10분 동안 부처같이 행동하면 10분짜리 부처다.


부처되기 참 쉽죠?

대중스님,

스님들은 몇 분짜리 부처가 되고 싶으십니까?

염념불리念念不離하여 영원한 부처님 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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