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善 友 (본각스님)

운문사 | 2005.12.26 17:25 | 조회 2938

첫발심 했을 때가 부처를 이룬 때고

생사와 열반경계 바탕이 한 몸일세

나무아미타불



처음으로 안기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어린 싹처럼

우리는 하루해가 늘 처음처럼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처음처럼 아침처럼

시작하는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사집반 본각입니다.

봄이 오는 길목에 새로운 치문반 스님들의 첫 철 방부들임을 축하드립니다.

운문사에 ‘치문' 첫 방부를 들이고 긴장과 초조감에 휩싸여 멋모르게 반 스님들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 훌쩍 지나 후배 치문반 스님이 들어왔다고 축하 인사를 해주는 사집반이 되었습니다.

치문緇門이 곧 먹물 들이는 작업의 시작이라 했듯, 일상의 어느 곳에서나 가장 가깝게 항상 가르침을 주신 여러 대중 스님들의 은혜에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탁마상성 붕우지은(琢磨相成 朋友之恩)이라 했습니다.

어느날 아난은 부처님께 공경히 예배하고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깊이 헤아리건데 착한 벗이 있고 좋은 도반과 함께 수행하는 것을 이 성스러운 길의 절반에 이른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아난아, 그것은 잘못이다. 그렇게 말해서는 안된다. 착한 벗이 있고 좋은 도반과 함께 수행하는 것은 이 성스러운 길의 전부이니…"


그리고 덧붙여서 자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좋은 친구로 삼음으로써 늙어야 할 몸이면서도 늙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죽어야 할 몸이면서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고독과 번민을 지닌 몸이면서도 고독과 번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좋은 벗과 함께 수행한다는 것은 이 길의 전부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함경 ‘선우(善友)’ 편에 나오는 부처님과 아난존자의 대화입니다. 우리들 수행인에게 있어 어질고 참된 벗과 참된 선지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일깨워 주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수행인에게 좋은 벗은 도를 성숙시켜주는 선우요, 또 참된 선지식은 도를 증장시켜주는 스승이라 하였습니다.

그럼 좋은 벗이란 어떤 벗일까요?

물론 만나면 반갑고 즐겁고, 기쁨과 슬픔을 같이하며 더러 사는 일이 힘겨울 때 언제이고 책려해주는 사람, 나의 잘못을 조용히 지적해서 고치게 하는 사람. 그래서, 깊이 신뢰와 존경이 가는 사람! 이런 벗을 우린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인 사람을 만나면 화가 나고 싫고, 나에게 무엇이든 해를 끼치는 사람에게는 거리를 둡니다. 어떻게든 피하고 굳이 부딪히지 않으려 합니다. 전 선우를 이런 저런 것이다 하고 가려 분별하기 보다는 우리 모두가 선우요 스승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250여명의 대중이 함께 모여 살다보니 좋고 나쁜 점이, 또 힘들고 머트러운 부분들이 분명히 있고, 스님들 각자 개성이 뚜렷하여 서로 맞지 않아 시시비비가 드러나기도 합니다. 처음엔 이런 부분들이 힘들었지만 서로 부딪히면서 좋은 공부가 되기도 하고 마음에 상처가 되어 몇일이 걸려서 풀어지기도 하고, 또는 찌꺼기가 남기도 하고 …… 돌아보면 대중 생활의 필수 공부였던 것 같습니다.

칼은 모든 물건을 자를 수 있지만 칼 자체를 자를 수 없으며,사람의 눈은 모든 사물을 볼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의 눈을 볼 수 없듯이 우리의 대중 생활은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입니다. 수행하는 우리에겐 이런 저런 것들을 가려 시비하는 것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치문 힘든 시절 저희 중강 스님께서 항상 공부와 일이 둘이 아니며, 도반의 미움과 고움이 둘이 아니며, 모든 일에 부처님께 기도하듯 일상 생활을 하라 하셨습니다.

신심명 첫 구절에

至道無難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唯嫌揀擇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但莫憎愛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洞然明白 통연히 명백하리라

라고 했습니다.

미운 도반, 이쁜 도반 이런 것들은 모두 마음에서 나옵니다. 미운 도반도 나에게서 나오고, 이쁜 도반도 내게서 나왔습니다. 또 미운 점을 보고 고쳐 돌이켜 나의 것을 삼는다면 무엇이 수행 생활에서 어려운 점이 있겠습니까?

법당에서 가사 장삼 수하고 법답게 예불 모시는 뒷모습에서 수업시간 빛나는 눈으로 열심히 경을 배우는 스님들 모습에서 신심나게 입선 시간 독송하는 모습에서도 경이나 주력을 하루하루 쉼 없이 정진해가는 모습에서도 대중 스님들의 먹거리 준비하느라 일사불란하게 울력하는 스님들 모습에서도 법당에서 안행하고 올 때, 종두 스님들의 공양 나르는 모습에서도, 각 구역 청소 시 一心으로 깨끗이 하는 모습에서도 리어카에 쓰레기통들을 가득실고 소각장으로 향하는 스님, 그 각각의 모습들에서도 선우의 모습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나에게서 나와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누구를 탓하기 이전에 각자가 나를 돌아본다면 우리는 정말 아름다운 수행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운문사 생활에서 어려웠던 점은 규칙적인 시간, 행동은 신속하게, 말은 정확하게…

등 이었습니다. 행동이 빠르지 못하다 보니 뛰어야 겨우 반과 같이 할 수 있었고, 말은 느린데다 정확하지도 않아서 특히 상반스님께 얘기할 때면 떨려서 할 말을 잊어버려 머뭇거리다 걱정듣기도 하고, 저의 물건을 잘 챙기지 못해서 반 스님들이 저를 찾아다니며 챙겨주기도 하고, 여러 면에서 반 스님들을 뇌롭게 했습니다. 제가 또 ‘한 잊음’ 하기 때문에 조가 각각 짜여져서 돌아가는 운문사 생활에서 얼마나 조장스님들을 힘들게 했겠습니까?

고의는 아니었지만 참 머트럽게 살아서 마음에 부담이 되었습니다. 반 스님들이 잘 챙기도 도와주지 않았다면 전 정말 힘들었을 겁니다.


강원 생활에서 서로 돕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 같습니다. 도와주시고 경책해 주신 덕분에 지금의 제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가슴 따뜻한 사람들이 모여 수행하는 이 곳이 있기에 청풍료 뜨락은 언제나 당당한 것 같습니다. 같은 길을 함께 가는 탁마 도반의 원융한 어울림으로도 제가 선택한 운문의 도량은 실로 넉넉하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이 도량에 모인 귀중한 인연을 더욱 아름답게 승화시키는 좋은 탁마 도반이 되어야 겠습니다.

성불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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