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지심귀명례 (혜륵스님)

운문사 | 2005.12.26 13:27 | 조회 3660

지금으로부터 2600여년전 히말라야 남쪽의 카필라국이라는 작은 왕국에서는 장차 전륜성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 속에 벌솔도의 성주 정반왕과 마야부인 사이에 한 아기가 탄생했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태자는 사방으로 일곱 발자국을 걸으며 또렷한 발음으로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 삼계개고三界皆苦 아당안지我當安之"

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런 신화적 탄생으로 시작된 태자는 대중스님들께서도 잘 알고 계시듯이 왕자로써의 영화스러운 세속적 삶을 뒤로하고 "이 생을 부처의 생으로 하여 윤회의 마지막 삶이 되게 하리라. 내 오직 이번 삶 동안에 모든 중생을 제도하리라."는 원력으로 출가하시어 6년의 고행 끝에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십니다.

몸소 겪으신 생로병사의 시현과 45년간에 펼쳐진 전도는 많은 미망의 중생들을 깨우침의 세계로 인도하셨으며, 열반에 드시기까지 중생을 위한 대자대비의 삶을 이루신 일대장교 앞에 결렬한 뜻을 발하며 엄숙히 지심귀명례 합니다.


불문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되는 초심자로써의 하루는 '지심귀명례'로부터입니다.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를 사전적 언어에서는 귀명歸命은 나무南無의 음역으로서 "목숨을 바치다, 자기의 신명身命을 던져서 불佛에 귀취歸趣하다"는 뜻이고, 귀명례歸命禮는 "신명身命을 받들어 삼보에 귀의하여 예배하는 것" 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일상적인 어떤 대상에 대한 단순한 예배가 아니라, 몸과 목숨을 버려서 예배의 대상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절대적인 귀의를 뜻하는 것입니다.


티벳불교 수행 中에 계신 어떤 스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법회를 거행하는 티벳사원에 참석하게 되면 법사는 제일 먼저 귀의의 중요성과 함께 보리심에 대한 가르침을 설한다고 합니다. 또한 티벳 사람들은 기차나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사고의 위험에 직면했을 때에는 "귀의금강상사", "귀의불", "귀의승"이라는 귀의문을 간절히 외운다고 합니다.

그리고 티벳불교 수행에 입문하게 되면 제일 먼저 귀의 대예배 10만번을 해야 하는데 귀의의 대상을 묘사한 탕카(티벳의 탱화)를 앞에 모셔놓고 오체투지를 하면서 입으로는 귀의문을 외우고 마음으로는 "육도의 중생들이 다 나의 어머니"라고 생각하면서 모두 함께 간절한 마음으로 삼보께 귀의함을 관상한다고 합니다.

물론 오체투지의 횟수가 다소에 따라 귀의의 격과 질을 판단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형식이 없는 곳에 내용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본질적인 내용이라는 것은 어떤 요식행위를 통해서 발로되며 더욱 증진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신라의 고승이신 원효스님께서는 『발심수행장』에서


拜膝이 如氷이라도 無戀火心하며,

절하는 무릎이 얼음같아도 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없이 하며,

餓腸이 如切이라도 無求食念이니라

주린 창자가 끊어질 것 같더라도 밥을 구하는 생각을 없이하라.


라고 하셨습니다.

또 『고소경덕사운법사무학십문姑蘇景德寺雲法師務學十門』중에

欲求法者인댄 當折我心하야

법을 구하고자 할진댄 마땅히 아만심을 꺾어서

恭默思道하며 屈節卑禮하야

공경하고 묵묵히 도를 생각하여 뼈마디를 굽혀서 자기를 낮추어서 예하고

以敬事長하여 尊師重道하야

공경으로써 어른을 섬기며 스승을 섬겨서 도를 귀중히 하여

見賢思齊리라.

현인을 봄에 같아지기를 생각할지니라.


이렇게 옛 성인들께서도 불도에 이르고자 하는 수행자들은 스스로 몸과 마음을 조복받는 고통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십니다.

한끼만 굶어도 열흘 굶은 양 안색이 달라지고 몸이 좀 불편한 데가 있으면 마음씀씀이마저 이내 각박해집니다. 도반스님들은 염두에도 없고 나 혼자만을 내세우는 이기심과 아만이 팽배해지면 이것도 수행의 한 과정인가, 어디까지 받아들여 섭수할 수 있을까, 많은 슬픔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마음은 항상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고 채찍을 가하지만 부모를 여의고 떠나오면서 삭발한 그 모질고 매서우리만큼 당찬 첫 발심의 모습은 가끔 어디론가 묻혀져 희미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가끔은 내 자신이 어디만큼 와 있는 것인지 사뭇 불안감에 젖기도 합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육친을 여의고 삭발염의한 수행자입니다.

출세간에 무엇이 미련이 있고 어떤 것들이 두렵겠습니까. 한낮의 코끝을 스쳐가는 바람결이 나의 무명을 일깨워줍니다. 도량이 온통 초록의 여름이 무르익어가고 있습니다.

한 줄기의 소낙비에 모든 산천초목이 춤을 추듯 싱그러운 지금, 초록빛의 신심을 흠뻑 들여 마시고 싶습니다.

진정한 출가는 언어를 여읜 귀의에 있음을 알기에 그저 묵묵히 한걸음 한걸음 내딛으며 지심귀명례 할 뿐입니다.


부처의 길을 가고자 하기에 웃어른 스님들의 가르침을 열심히 배우고 상반스님들의 경책속에서 행동거지를 익히며, 같은 반스님들로부터 어우러짐속에서 모다에 하나있고 하나에 일체 있음을 느끼며 오늘 하루를 보냅니다.

오늘의 이 자리가 더욱 더 대중스님들과 정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면서, 끝을 맺을까 합니다.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


대중스님,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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