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사집과- 소윤스님 차례법문

최고관리자 | 2014.10.18 00:05 | 조회 1957

 초심자와 승가

                                      
사집과 소윤



여러분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여여 하신지요?  <초심자와 승가>라는 제목으로 차례법문을 하게 된 사집반 소윤입니다.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동서양을 오가며 그들의 생활과 생각에 대해 취재한 프로그램을 본적이 있습니다.  동양권의 학생들에게 자기소개를 해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집안 식구는 몇 명이고, 구성원이 누구며 나는 그 중 무엇이 다 라고 대답하며 자신이 공부를 하는 이유는 본인의 자아실현과 성취보다는 길러주신 부모님, 가르쳐주신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는 등의 유교적 정서가 가득담긴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체적으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는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고 했던가요..일반적인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변 인물들의 기대와 총망을 받기 때문에 그들을 무시하고 나만 생각하며 살아가지 못합니다. 관계속의 누군가가 좋아하거나 원하는 것을 성취하면 나의 선택이 올바르며 정당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관계 속에서 매몰되어 살다 나이가 들면  내가 지금껏 뭣 때문에 살았는가. 회한이 밀려옵니다. 사회가 발전하고 교육의 기회와 폭이 무한히 넓어지고 지식이 물밀듯이 밀려들수록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의 존재에 의문을 갖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저를 비롯한 몇몇은 그런 사회적 환경에서 뿌리내렸다가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위해  삭발 염의하고 이곳에서 다시 옮겨  심기 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승가는 또 다른 울타리였습니다. 대자유의 의지를 접어 둔채 우리는 강원에서 정해진 규율과 생활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자신이 선택한 자유의 길인데도, 다시 승가라는 곳에 속박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때로는 억울하고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울 때도 있고..그래서 짐을 쌌다가 풀었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기도 합니다. 남은이건 떠난 이건 어느 쪽이 더 올바른 쪽이라고 말하긴 힘들지만, 출가한 이들에게 혹 승가라는 공동체의 존립 이유가 필요성이 부재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부처님 재세시의 승단의 조직과 계율이 이렇게 오랜 시간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를 네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첫째, 불조의 혜명을 잇는 목적의식입니다.
 부처님은 전문적인 수행승 집단인 출가승단을 만들었으며, 승단의 구성원들이 출가의 목적인 궁극의 경지 아라한과에 이르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아라한이 되기 위해 각자의 수행만 했다면 불교는 한 점이나 한선밖에 만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점이 모여 둥근 일원상을 만들듯 대중이 함께 지켜왔기 때문에 불법이 3000년 가까이 유지 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둘째, 공동체를 구성하는 뼈대의 역할을 하는 계율입니다
대부분의 종교에서 도덕적 의미의 계는 흔히 볼수 있지만 율은 불교만의 독특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교교단은 출가자, 재가자 모두 학습에 의해 전문 지도자로 양성되기 위한 조직이었기 때문에 성립당시 정치, 권력으로 부터 독립돼 자치적 통제율이 필요했습니다.

불교에서 계율제정의 윤리적 기초는 "사람의 생각은 어디에나 갈 수 있다. 그러나 어디로 간들 자기 보다 더 소중한 것은 볼 수 없다. 그것과 같이 다른 사람에 있어서도 스스로는 소중하다. 그러면 스스로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자는 남 또한 불편하게 하거나 해쳐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경전 에서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은 남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남을 나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불교에서 말하는 동체(同體)란 바로 이러한 것을 말하고, 이같이 타인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의미로 지계를 강조하였습니다.

셋째, 좋은 도반과 선지식의 존재입니다.
 상응부(S45:2)에서 아난존자가 "세존이시여 이 좋은 도반됨(선우), 좋은 동료됨, 좋은 벗됨은 청정범행의 절반이 됩니다."라고 하자 세존께서는 "아난다여, 그렇지 않다, 아난다여, 그렇지 않다. 좋은 도반됨, 좋은 동료됨, 좋은 벗됨은 청정범행의 전부이다. 좋은 도반, 좋은 동료, 좋은 벗에게서 ‘팔정도를 수행할 것이다. 팔정도를 거듭할 것이다’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초심의 제자들에게 특별한 이유로 실망을 하시고 대중을 떠나 나무아래에서 이런 고민을 하셨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세속에서 떠나온지 얼마 안 되고 이 가르침과 계율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새로 들어온 비구들도 있다.  만약 그들이 나를 보지 못하면 마치 어린 송아지가 어미 소를 보지 못하여 송아지에게 변화나 변동이 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도 변화나 변동이 일어날 것이다.” 라고 하시며 다시 그들에게 돌아가셨습니다.

네 번째, 교단내 강력한 화합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법망경 보살계본 10중대계 가운데 무려 네 가지가 대중 화합에 관한 것입니다. 삼보를 비방하지 말라,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남을 비방하지 말라, 성내지 말고 참회를 받아주어라. 라는 계목에서 볼 수 있듯 파화합을 경계하셨습니다.


범망경 보살계본 서문에 [바라제목차는 계를 말함이니 이는 신자들의 스승으로써 이 계를 지니면 어두운 곳에서 불빛을 만난 것과 같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두운 밤 등대는..뱃사람들에게 길잡이가 되어줍니다. 그러나 뱃사람은 그것이 그저 불빛일뿐 각자 제가고 싶은 곳으로 이리저리 노를 젓습니다. 등대가 잘못된 길을 가지 않도록 아무리 빛을 밝히고 있어도 뱃사공은 믿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무명에 가리워 오랜 시간을 보내고 이제 막 그것을 벗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빛을 알아 본지도 얼마 되지 않은 우리에겐 어쩌면 지금 등대보다도 더 밝은 빛과 힘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힘은 승가이고 그 안에 있는 계율이며 도반이며 선지식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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