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아상(我相)과 하심(下心), 그 멀고도 가까운 거리 - 사교과 진오下

가람지기 | 2018.09.29 20:31 | 조회 2028

안녕하십니까?

푸른 하늘 아래 햇빛 향기를 맡으며 아상(我相)과 하심(下心), 그 멀고도 가까운 거리로 차례법문을 하게 된 사교반 진오입니다.

 

은사스님께서는 제게 하루 일과 기도를 반드시 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그 숙제는 매일매일 108배를 하는 것과 금강경 독송을 하는 것입니다. 운문사에서 생활하다가 방학 때 집에 가면, 은사스님께서는 기도를 꾸준히 하고 있는지 물어보시곤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은사스님께서 기도를 계속하고 있는지 물어보시고 이어서 새로운 질문을 하셨습니다. "진오야. 금강경을 독송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이 무엇이냐?"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당황했고, 침묵만이 흘렀습니다. 금강경 독송을 하면 좋다고 해서 읽기만 했을 뿐, 어떤 의미인지 알려고 하지 않은 채 의무적으로 숙제를 했었습니다. 질문에 답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금강경 제16분인 능정업장분(能淨業障分)에서는 금강경을 수지독송(受持讀誦)을 하면서도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면, 이 사람은 전생에 지은 죄업으로 반드시 지옥이나 아귀, 축생에 떨어질 것이지만, 금생의 사람들이 자신을 업신여김으로써 전생의 죄업이 모두 소멸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땅히 이 사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최상의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처음에 이 글귀를 보았을 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경을 독송하는, 이토록 수승한 일을 하는데 다른 이들에게 무시당하는 일이 생기고, 또 무시를 당하면 왜 업장이 소멸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자신의 결백을 호소할 수도 있을 텐데, 왜 바보같이 가만히 있어야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육조혜능대사께서는 금강경을 수지독송 하는 사람은 비록 일체 중생에게 공경과 공양을 받을 만하지만, 많은 생에서 지어왔던 두터운 업장이 있기 때문에 이번 생에서 멸시를 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 끊임없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는다면 업장으로 인해 생기는 모든 장애를 소멸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남에게 천대를 받고도 그저 억울함을 수용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상과 인상이 없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아상이 없으면 다시는 윤회하는 업을 짓지 않고, 비록 과거에 지었던 무량한 죄업이 있을지라도 죄의 뿌리까지 이미 없어졌기 때문에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초기 경전에서는 상 ()을 네 가지 관점으로 보았습니다. 빨리어로 산냐(saññā)는 인식이라는 의미의 상으로 쓰였고, 빤냣띠(paññatti)는 상을 개념과 명칭으로써 정의하였습니다. 니밋따(nimitta)는 삼매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영상을 상이라고 말하였고, 산스크리트어로 락샤나(laksana)는 부처님의 3280종호의 좋은 특징을 상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이 네 가지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것은 산냐를 없애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산냐를 없애는 방법은 순간순간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몸과 마음의 현상을 바로 알아차리는 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강조하신 것처럼 금강경을 배우는 내내 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아상(我相)의 작용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금강경에 설의(說誼)를 하신 함허 득통 스님은 아상이 없다는 것은 타인보다 아래에 서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인 하심(下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심(下心)... 사교반에 올라와 이 단어가 순간순간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운문사에서 치문과 사집을 지내고 사교반이 되면서, 청풍료에서 금당으로 독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금당이라는 분리된 생활공간은 상반 스님과 하반 스님의 시집살이에서 보다 여유 있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였습니다. 자연스레 몸과 마음은 이미 화엄반이 된 것처럼 위풍당당해졌습니다. 아상이 저 높이 치솟은 것입니다. 그럴수록 운문사의 생활과는 대조적인 은사스님이 계신 절에서의 삶은 저를 지치게 만들었습니다. 하루에 서 너 개의 소임을 살아야 하고, 몸은 하나인데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저를 부를 때면, 힘에 버거웠습니다. 운문사에서는 예비 4학년이지만, 절에서는 층층시하 속으로 돌아온 행자였습니다.

 

은사스님이 계신 절에만 가면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암울한 상태로 지내던 중에 함허 스님께서 아상이 없다는 것은 타인에게 하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구절을 보면서 순간 정신이 아득했습니다. 행자시절에는 두 손 모아 차수하고, 어른 스님께서 잘못을 지적하시면 자신의 실수든 아니든 즉각 인정하며 "잘못했습니다"를 반복하고, 참회하며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출가한지 얼마나 지났다고 고작 3학년이 되어 하심을 잊어버렸었습니다. 나의 시간, 나의 가치라고 고집하고 있는 나의 것들을 모조리 타파할 수 있는 환경에서 공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현실에 불평하고 허황된 꿈을 꾸며 더 안락한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내 것이라고 고집할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집에서의 삶도 저보다도 더 바쁜 은사스님의 손발이 되어 마치 아난다 시자처럼 살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이제는 은사스님께서 금강경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시면 "善男子 善女人 受持讀誦此經 若爲人輕賤 是人 先世罪業 應墮惡道 以今世人 輕賤故 先世罪業 卽爲消滅 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라고 바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는데도, 만약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면 이 사람은 전생에 지은 죄업으로 응당 악도에 떨어질 것이지만, 이번 생에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함으로써 전생의 죄업이 곧 소멸되고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금생에서는 앉으나 서나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면서, 아상을 녹이고 하심하는 금강경 행자로 살기를 발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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