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수행 - 사교반 범응

가람지기 | 2020.10.18 18:23 | 조회 879

저는 가을철부터 능엄경을 배우고 있는데 그 첫 장으로 칠처징심에 대해 배우고 있습니다.

일곱 칠 七, 곳 처 處, 물을 징 徵, 마음 심 心. 마음이 있는 일곱 가지 장소에 관해 묻는다는 뜻으로 부처님의 제자 아난존자가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7가지 장소에 관해 부처님과 주고 받은 문답을 담고 있습니다.

사실 이 칠처징심 자체는 굉장히 희론적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을 대상화해서 거기에 끊임없이 언어와 의미를 부여하며 

분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안에 있냐, 밖에 있냐, 눈 밑에 있냐, 중간에 있냐 등등 모든 희론을 따라가다 보면 

머리가 아주 복잡해집니다.

 

그럼 경전은 왜 이런 희론으로 많은 부분을 소비하고 있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질문하는 자와 대답하는 자 사이의 간격이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질문하는 자는 생멸의 세계에 사는 중생의 관점에서 중생의 언어와 논리를 

이용해 질문하고 있고 부처님이 답하고자 하는 마음, 즉 상주진심이라는 것은, 모든 언어와 논리를 여윈 그 어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언어와 논리가 동원되어 답이 제시되다 보니 자칫 미궁으로 빠지는 인상이 들기도 하고

분별과 언어, 논리를 통한 이해를 실상에 대한 참된 이해로 혼동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마음이라는 것은 모든 사량분별을 떠난 어떤 것이어서 머리만으로는 그 실상을 이해하는데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한계를 보완해줄 무언가가 필요한데 저는 여기서 그것을 수행이라 부르고자 합니다


여기에 계신 여러분은 어떤 수행을 하고 계십니까

모든 것이 수행이고 수행 아닌 것이 없다고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것이 수행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자기 변화가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죠.


저의 행자 시절, 습의사 스님은 반야심경 정도는 일반 보살님들도 다 외우고 있는 건데 어떻게 그것 하나 못 외우고 출가를

 했냐며 빨리 기도문들을 외워야 한다고 걱정하셨습니다

저는 낯선 용어와 한문이 가득한 기도책을 보며 이걸 외우는 게 과연 가능할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니 반야심경, 천수경, 초발심이 외워졌고 지금은 경반이 되어 금강경을 외우고 능엄주를 외우는 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한문으로 되어있는 현판을 읽지 못해 만세루가 어디인지 몰랐던 시절에서 지금은 한문으로 된 경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고 예불, 발우, 입선 같이 평생 해 본 적 없는 삶의 방식들이 이제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으니 

정말 일취월장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과연 제가 수행자로서 조금이나마 진일보했다는 어떤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이런 언어적, 교리적, 관습적 이해와 훈련이 마음이라는 어떤 것을 이해하고 체달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을까요

이러한 질문에 답해보기 위해 저는 잠시 시공간을 이동해 여기서 멀지 않은 며칠 전의 후원으로 가보겠습니다.


이날 저는 별좌냉장고 안에 갇혀 잠시 생과 사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대중 스님들이 놀라실까 봐 먼저 이 드라마의 스포일러를 말씀드리자면 사실 이 냉장고 문에는 안에서 열고 나올 수 있는 

또 다른 손잡이가 이미 달려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안에서 잠긴다, 밖에서 잠그다의 개념이 소용이 없는 안전한 문입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극적인 전개를 위해 주인공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몰라야 합니다. 제가 바로 그랬습니다.

별좌스님, 별좌스님.’ 쾅쾅쾅.

사실 이런 조용한 어조는 아니었고 제 평생 내 보지 못한 그 어떤 데시벨의 소리였습니다.

여러분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아무튼, 굳게 닫힌 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고 하필 그 순간 냉장고는 굉음을 내며 희뿌연 냉기를 내뿜었습니다.

하얀 냉기에 휩싸이는 순간 어디선가 심심치 않게 들었던 동사한 사람들에 관한 사건 사고 기사가 머리에 전광석화처럼 

스쳐 지나갔고 저는 절박하게 아니 절박이라는 말은 그 순간을 표현하기에는 좀 느슨한 단어이지요.

아무튼, 저는 별좌스님이 멀리 가기 전에 저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는 날이 선 절박감에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리며 

별좌스님을 외쳤습니다.

 

사실 저는 생사는 둘이 아니라는 말을 배운 사람이었고 죽음에 대한 여러 의견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경을 배우고 조사의 말들을 배우며 생사에 대해 사유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죽음이라는 그 절박의 경계에서는 사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금강경의 한 구절도 능엄주의 한 음도 제 안에서 흘러나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원초적인 생명에 대한 본능만이, 생명에 대한 강한 집착만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생생하게 살아 또렷또렷이 있었습니다.

또 저는 평소 죽음의 지난한 과정, 즉 늙고 병들어 혼자 운신하지 못하는 것이 두렵지 정작 죽음 자체는 두렵지 않다고 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얼어 죽을 수도 있다는 그 절박의 경계에서 저는 죽음 자체에 벌벌 떨며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사실 살려고 애쓸 필요도 얼어 죽을 일도 없는, 말 그대로 애초에 아무 일도 없을 일인데 혼자 전도 몽상해서 그렇게 짓고 

만들어 허둥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저는 머리를 깎고 이렇게 거룩한 옷을 입고 있지만 사실 단 일 밀리도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고

완벽하게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어지러이 있었던 것입니다. 4년이 넘는 시간을 이런 전도망상 속에 살면서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한 것을 생각하니 은산철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막막했습니다. 그동안의 모든 것이 껍질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런 제 심정을 대변이라도 해주듯 아난존자가 체루비읍하며 부처님께 말합니다.


제가 부처님을 따라 발심하여 출가한 이래로 부처님의 위신력만 믿고 항상 제가 애써 닦지 아니하여도 여래께서 삼매를 얻게 해주실 것이다고 생각했지, 몸과 마음이 본래 서로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여 그만 저의 본심을 잃어버렸습니다. 제가 비록 몸은 출가를 하였으나 마음이 아직 도에 들지 못한 것이 마치 헐벗은 아들이 아버지를 피하여 도망다니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비록 다문했다 하더라도 만약 수행하지 아니하면 듣지 아니한 것과 같은 것이, 마치 어떤 사람이 음식을 말하는 것으로는 마침내 배부를 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실 저는 그날의 기억이 아직 너무 생생해서 여전히 안으로는 체루비읍하고 있습니다.

그동안의 관성을 멈추고 그저 주시하고 있는 중이기도 합니다. 그 외에 별다른 도리를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필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하루를 살든 이틀을 살든 출가한 도리를 조금이라도 하기 위해 다음 세 가지 

일을 수행의 서원으로 품고 가려고 합니다.

첫째, 내가 먹고 입고 하는 것 하나 하나가 여러 생명의 수고와 고통이 수반되는 정말 중요한 문제이므로 신중히 하고 또 신중히 할 것

둘째, 신구의를 맑히고 맑힐 것.

셋째, 기도하고 정진할 것.

이상으로 차례법문을 마칩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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