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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은 무슨 재미로 사는가

원치용 | 2009.05.06 03:08 | 조회 2213
부처님이 고향인 카필라국 니그로다 정사에 계실 때였다. 부처님의 조카이면서 석가족의 왕자인 마하나마가 어느 날 부처님을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집착과, 분노, 어리석음을 마음의 번뇌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이러한 집착과 분노, 어리석음에 빠져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마하나마여, 자네가 아직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그것 때문에 집착과 분노, 어리석음 등의 번뇌에 빠져 살고 있는 것이다. 자네가 만약 그러한 세속적인 집착을 버렸다면 아마도 세속에서 감각적 즐거움을 충족시키기 위해 살지 않고 출가하였을 것이다. 마하나마여, 내가 예전에 올바른 진리를 깨닫기 전에 이런 생각을 하였다.

‘세속의 감각적 즐거움은 일시적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짧은 만족의 순간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위험과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으며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유익한 삼매의 기쁨과 행복, 평온을 체험하기 전까지는 세속의 감각적 즐거움을 떨쳐 버리기 어려울 것이다.’ 마하나마여, 그대가 만약 세속의 집착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면 유익한 삼매의 기쁨과 행복, 평온을 성취할 수 있어야 한다.”

세존께서는 다시 예전의 일화를 일러주시면서 더 구체적인 설명을 이어가셨다.
“마하나마여, 내가 전에 라자가하에서 고행을 닦고 있는 니간타 수행자들을 만났었다. 그들은 몸을 극도로 괴롭게 하는 고행을 통해 과거의 업을 소멸시키고 말과 행위와 생각을 조심스럽게 하여 미래의 업을 짓지 않아 번뇌를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자신들이 과거에 존재했었는지, 어떤 악업을 지었는지, 악업을 지었다면 그것이 왜 악업인지, 또 얼마만큼 괴로운 업이 소멸되거나 소멸 될 업이 남아 있는지, 무엇이 선업이고 무엇이 악업인지 등을 물었지만 그들을 대답하지 못했었다.

그들은 나에게 말하기를 나라의 임금인 빔비사라왕은 세존보다 더 큰 즐거움 속에 살지만 진정한 즐거움을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은 고행을 통해 즐거움을 성취하려 한다고 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와 빔비사라왕 중에 누가 더 즐거움 속에 살고 있느냐고 반문하였다. 나는 하루나 이틀, 삼일 혹은 7일 밤 낮 동안 온통 지극한 즐거움 속에서 머무를 수 있는데 과연 임금이 말도 안하고 움직이지도 않고 그렇게 며칠 동안 즐거움의 상태로 있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마하나마여, 만약 유익한 삼매의 기쁨과 행복, 평온을 성취한다면 세속적 즐거움과는 비교할 수 없다.

자네가 세속의 집착들을 버리기 원한다면 그것들 보다 더 큰 수행의 기쁨을 성취해야만 가능하다.”(맛지마니까야-작은 괴로움무더기에 대한 경)

마음을 비우고 잘 살아보겠다는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 마하나마와 같은 생각을 가져 보았을 것이다. 번뇌에 물들지 않고 잘 살고 싶은데 현실은 마음대로 그렇게 되지 않고 오히려 끊임없이 번뇌에 끌려 다니며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도 하고 때론 좌절하기도 한다.

우리들은 수행을 한다고 하지만은 세속적인 즐거움에 더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처럼 수행을 통해 삼매의 기쁨과 행복, 평온을 체험하기 전 까지는 절대로 마음의 번뇌를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스님들은 무슨 재미로 사는가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는데 아마도 이러한 수행의 기쁨이 있기에 정진의 길을 선택했으리라 본다.

지장 스님 서울 대원정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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