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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거산 운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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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와 '삼국유사 일연스님'

가람지기 | 2008.12.23 18:52 | 조회 2688

‘고달픈 민초의 삶 달래자’ 화두를 잡다

일연스님, 운문사 머물며 ‘삼국유사’ 집필

현재는 자취와 행적 남아 있지 않아 ‘씁쓸’

<삼국유사>는 불후의 문화유산이다. 이 책이 그 가치에 걸맞게 대중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게 몹시 아쉽다. 물론 국사 국어 교과서 등에 <삼국유사> 소개가 나와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저 사실의 단순한 나열과 단편적 이야기로 일관되어 있어 그다지 인상적으로 다가오지를 않는다. 가치와 해설을 곁들여 세계에 제대로 알린다면 고대의 문학과 신화와 역사와 미술을 아우르는 종합문화서로서 ‘그리스 로마 신화’만큼이나 서양 사람들은 열광시킬 거라고 나는 믿는다.

따라서 이 책을 지은 일연스님 역시 보통의 인물일 수가 없다. 물론 일연스님은 이미 있는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편집했을 뿐 창작한 건 아니지만, 그 점이 오히려 이 책의 사실성을 높인다. 또 숱한 역사의 편린들을 긁어모으고 다시 거기에서 필요한 것만을 추려낸다는 게 어지간한 안목과 감식안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일 테니, 이 역시 일연스님의 노력을 깎을 이유는 전혀 못된다. 일연스님은 <삼국유사> 외에도 많은 책을 지었다. <중편조동오위>는 그 중 하나인데, 중국 남종선의 한 문파인 조동종(曹洞宗)의 오위설(五位說)에 대한 주석서다. 하지만 1974년에야 뒤늦게 이 책이 그의 저술임이 밝혀질 정도로 그 동안 우리의 관심을 거의 받지 못했다.

<삼국유사>의 그늘이 너무 커서였을까. 여기서 잠시 일연스님에 대해 얘기하고 가야겠다. 스님은 고려가 정치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하던 때인 1206년 경북 경산에서 중류 집안의 유복자로 태어나, 14세에 양양 진전사에서 출가했다. 22세에 개성 광명사에서 열린 선불장(選佛場)에서의 수석 합격은 그의 출중한 소양을 입증한 일에 다름 아니었고, 그 뒤 고향 부근인 현풍 비슬산에서 20여 년 간 정진했다.

당시는 이른바 무신정권 시대로 1235년(고종 22) 몽고의 3차 침입으로 전 국토가 황폐화 되어 있었다. 국민의 고달픈 삶을 달래줄 정신적 안식이 필요했고, 나라에서는 대장경 간행을 추진했다. 일연스님은 남해 정림사로 옮겨 대장경 간행을 지휘했다. 이후 강화도 선원사, 포항 오어사, 비슬산 인흥사 등에 머물렀다. 이 무렵 그의 이름은 전국적으로 알려질 정도여서 1268년 나라에서 선종과 교종의 이름난 승려 100명을 모아 운해사에서 대장 낙성회를 열었을 때는 당연히 맹주로 추대되었다.

이때의 일을 당대 최고의 문장가 민지(閔漬)는 이렇게 표현했다. “낮에는 금문(金文)을 읽고 밤에는 종취(宗趣)를 담론하였다. 이론가들의 의심나는 바를 스님은 모두 물 흐르듯이 해석해 내매, 그 정밀한 뜻이 입신의 경지에 이르니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일연스님은 상당히 많은 절에서 주석했다. 훗날 <삼국유사>가 철저한 현장성을 바탕으로 저술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삼국유사>에 실린 수많은 설화와 역사적 기록이 모두 현장 답사를 통한 채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특히 중요하다.

일연스님의 자취를 좇아 나선 여행, 군위 인각사에서 나온 발길은 자연스레 청도 운문사(雲門寺)로 향하였다. 운문사는 일연스님이 1277년부터 1282년까지 머물던 곳으로, <삼국유사>가 완성된 곳은 인각사이지만 본격적 집필은 운문사로 옮긴 후였다. 운문사는 사역이 넓은 편이다. 이곳처럼 인위적으로 높낮이를 둔 단을 만들지 않고 하나의 널찍한 평지에 많은 전각들을 배치한 곳도 흔치 않다.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형국이라는 호거산 아래에 이렇게 좋은 터가 자리하고 있으니, 우리나라 사찰의 품격을 위해서도 운문사라는 절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불이문을 들어서면 주로 북쪽에 법당 등의 전각이 들어서 있고 남쪽에 스님들의 생활공간인 요사가 있다. 대웅보전을 비롯해서, 비로전.오백전.응진전.조영당.금당.관음전.명부전.칠성각, 그리고 설선당.육화당.설현당.피하당.청풍료.삼장원.죽림원.목우정.채경당 등의 요사와 강당 건물 등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 웅장한 만세루 누각과 범종각도 운문사의 고요하면서 품위 있고 또 한편으론 푸근한 느낌을 주는 풍경에 한몫을 한다.

그런데 이 넓은 사역을 아무리 둘러봐도 일연스님을 떠올리게 하는 유적이나 유물은 도무지 눈에 띠지 않는다. 한참을 둘러보다 나이가 500년이나 되었다는 저 유명한 ‘운문사 노송’ 아래에서 한숨을 돌렸다. 해마다 봄이면 절에서 공양하는 막걸리 12말을 단숨에 자시는 이 노송은 과연 일연스님을 기억할까. 1277년부터 1281년까지, 5년을 머문 곳이건만 지금 여기서 그의 체취를 전혀 느껴보지 못하는 건 몹시 아쉽다. 700년이 넘은 시간을 생각하면 유형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음을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지만, 무형의 자취마저 거의 찾기 힘든 건 아쉬움을 넘어 섭섭한 마음까지 들게 한다.

예를 들어 운문사 홈페이지에서도 원광국사, 보양국사, 원응국사 등 ‘삼대중창주’는 잘 나와 있어도 일연스님 이름 두 글자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인각사와는 달리 일연스님의 부도나 비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이곳이 <삼국유사>의 집필 현장이었음을 생각한다면(혹은 여기에서 <삼국유사>를 탈고하였다는 설도 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운문사의 역사 속에 그의 행적과 자취를 드러내 놓는 게 좋지 않을까?

일연스님은 운문사와 비슬사 등 경상도 일대의 여러 사찰에 머물면서 교화를 크게 펼치며 왕의 존경을 받았는데, 이것은 운문사가 가지산문의 주요 사찰로 정착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그를 ‘운문화상(雲門和尙)’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니, 따지고 보면 일연스님과 운문사와의 인연은 아주 깊은 것이다.

그러니 지금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훨씬 더 일연스님을 선양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을 것 같다. 몇 년 전 운문사 객사에서 하룻밤 묵은 적이 있었다.

평소 절에서는 잘 자지 않지만-오로지 절에 폐가 될까봐-그 날은 힘들 테니 묵어가라는 비구니 스님들의 호의가 고마워 하루 머물게 되었다. 평소 밤늦게 자는 습관이 있던 터라, 9시가 되자마자 일제히 소등되어-절에서야 당연하지만-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깜깜한 밤이 되자 적잖게 당황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놀랐던 것은 시냇물 소리였다.

내가 든 객사는 남에서 북으로 흘러내리는 개울가 옆에 있었다. 갑자기 맞은 초저녁(?) 잠이 잘 올 리가 없어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었는데 밖에서 들려오는 후두둑후두둑 하는 소리에 처음에는 비가 오는 줄 알았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 지 시간이 한참 지나도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어 나가보니 빗소리가 아니라 옆에서 흐르는 개울물 소리였다. 낮엔 졸졸 흐르는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밤에 들을 땐 그렇게 크게 들리는 줄 그 때 처음 알았다. 문득 느낀 건, 부처님 같은 성인들의 가르침이나 대중을 위한 노고가 실은 밤에 듣던 그 시냇물 소리만큼이나 크고 우렁차건만, 우리는 아쉬운 것 별로 없고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평소(낮)엔 느끼지 못하다가, 어려워지고 힘들어질 때(밤)를 당해서야 비로소 그 분의 가르침을 청하고 위대함을 깨닫게 되는 건 아닌가 싶었다.

기억이라는 건 참 묘하다. 잊고 싶은 건 아무리 해도 잘 잊히지 않고, 반대로 꼭 간직하고픈 기억은 아무리 애를 써도 금세 잊어먹곤 한다. 행복했던 순간들은 어쩌면 그렇게 잘 잊어먹게 되는지, 아무리 기억해내 보려 하지만 사랑했던 사람의 눈과 코와 입은 어느새 가물가물해져 버린다. 반면에 힘들고 괴로웠던 기억들은 긴 세월이 지났어도 어찌나 그렇게 생생한지….

사람의 기억은 분명 반(反)의지적 존재인 것 같다. ‘역사적 기억’도 마찬가지 아닐까. 좋았던 시절은 웬일인지 자주 언급되지 않고 넘어가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역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발전시키자는 일이니, <삼국유사>나 일연스님처럼 우리 불교사에서 자랑스러운 일과 인물들은 자꾸 되새겨 보았으면 좋겠다.

신대현 / 논설위원·사찰문화연구원

[불교신문 2485호/ 12월17일자]

2008-12-13 오후 12:48:05 /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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