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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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비구니 사찰, 고와서 서러운 금단의 영역

관리자 | 2008.06.02 00:18 | 조회 2887

운문사 경내


[하늘이 감춘 땅] 비구니 사찰 청도 운문사

파르라니 깎은 머리처럼 청초한 소나무길 ‘피안’
계곡 건너편 다실은 자연 속에 그려 놓은 ‘선화’


허버드 전 주한미국대사 부인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 한국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 하나를 꼽으라고 하자 ‘운문사에서 보낸 하룻밤’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경북 청도 운문사를 찾은 이들은 절 경내에 들어서기 전 정갈한 가사 장삼 사이로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반짝이는 사미니의 청초한 모습만큼이나 푸르른 소나무들이 정열한 길로 빨려들어가는 순간 그 부인이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게 됩니다. 같은 이름의 산과 절이 있는 중국의 호거산 운문사를 보지 않았다고 후회할 일은 없지만, 청도 호거산 운문사를 보지 않고 이생을 보내버렸다면 얼마나 아쉬웠을 것이냐고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허버드 전 주한미국대사 부인이 손꼽은 ‘그곳에서의 하룻밤’

저는 지난해 중국 광저우 인근 호거산 운문사에 가보았고, 우리나라 청도 운문사엔 올해야 처음 가보았습니다. 우리는 워낙 사대주의 교육에 물들어 있어서 중국이나 인도 등 원조에 대해 어떤 환상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많은 대중들 앞에서 설법했다는 영축산에 대해서도 큰 환상을 갖고 있었지요.
그러나 정작 인도의 영축산은 우리나라 경남 양산 영축산과 비교해 볼 때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인도의 영축산보다 우리나라의 영축산이 규모도 크지만 신령한 기운으로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지요. 중국의 호거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 청도의 호거산은 위용 뿐 아니라 아름다움으로도 참으로 빼어났습니다.

운문사 들어가는 길


운문사를 찾은 이들은 이미 깊고 깊은 영남알프스의 골짜기와 호수와 계곡들과 길가의 초목들과의 만남에서 피안의 세계를 향하는 마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운문사로 가는 길은 아름다웠습니다. 저는 여름과 겨울 두차례 그곳을 방문했는데, 아무래도 꽃이 만발한 여름의 운문사가 더욱 더 볼 만하더군요.

300여명 학승 기러기떼처럼 줄지어 대웅전 예불

운문사는 비구니 사찰입니다. 고타르마 싯타르타의 성불 일성은 모든 중생이 부처의 지혜와 덕성을 가지고 있다는 평등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나 교단 내에서조차 남녀 차별은 엄존했고, 대부분의 불교 국가에선 비구니 교단 자체가 사라져버렸습니다.
전 세계 불교계에서도 비구니가 어엿하게 출가자로서 행세하는 곳은 우리나라와 대만 정도 뿐이지요. 더구나 비구니만으로 강원과 선원 등을 가지고 있는 전통 비구니 사찰은 우리나라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 중심에 운문사가 있습니다. 3백여명의 학승들이 공부하고 있는 세계 최대의 비구니 사찰이지요.

경내를 걷고 있는 운문사 비구니 스님들


비구들보다 삶이 더욱 엄정한 비구니들을 교육시키는 곳이니만큼 이곳은 외부인들이 들여다보기 어려운 금단의 영역입니다. 관람객들이 구경할 수 있는 곳은 운문사의 일부일 뿐입니다. 그러나 대웅전으로 예불을 하기 위해 기러기처럼 줄지어오는 학승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21세기는 여성의 시대라 했던가요. 끝없이 정복하고 공격하고 폭력적인 남성성이 아닌 포용과 조화의 여성성이 중생을 건질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닐까요.

해마다 막걸리 열두말씩 먹는 500살 노송, ‘포용과 조화’ 여성성

운문사 경내에 들어서 가장 먼저 반기는 500년 된 노송이 그 여성성을 말해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어느 대사가 시든 가지를 꽂아 둔 것이 이처럼 처진 듯 옆으로 가지를 늘어뜨려 만개한 연꽃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합니다. 매년 음력 3월3일을 전후해 막걸리 열두말을 부어준다는 이 노송의 모습은 붓다가 당시로선 혁명적으로 여성의 출가를 허용한 평등 정신에도 불구하고 시들어버릴 뻔한 비구니들의 역사를 말해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끝없이 위로 치솟는 야욕의 남성 역사가 아니라 겸허히 자신을 낮추며 덕화를 주위에 미치는 어머니와 누이의 역사를.

운문사 노송


운문사 경내는 3백여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잠시도 쉬지 않고 소리 없이 울력을 하며 쓸고 닦고 가꾼 매운 손끝 덕에 흐트러진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모든 게 잘 정돈돼 있고 정갈합니다. 그들이 가꾼 경내의 경관은 비구들의 사찰에선 결코 맛보기 어려운 정교함이 있습니다.

운문사 비구니들의 안목이 그대로 깃들인 곳은 정작 운문사 계곡 건너편에 있습니다. 외부인에겐 공개되지 않는 극락교를 건너 경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죽림헌을 지나 연못과 팔각 정자가 어우러진 목우정이 있고, 연지와 실개천 옆에 곱게 앉아 있는 다실은 그야말로 운문사를 세계 최고의 비구니사찰로 가꾸어낸 주지 명성 스님을 비롯한 스님들이 자연 속에 그려놓은 한폭의 선화(禪畵)입니다. 그 그림 속에 블랙홀처럼 빨려들어가 앉았노라면 금단의 경계마저 허물어져 이곳이 과연 지상인가 천상인가 아련해집니다.

운문사 극락교 건너 정원

탐욕 부리자 쌀 대신 물이 나왔다는 전설의 사리암

호거산까지 갔다면 사리암을 놓칠 수 없는 일이지요. 운문사에서 동남쪽으로 차로 2~3㎞를 간 뒤 주차시켜 놓고 가파른 산길을 30~40분을 걸어 올라가야 하지만 사리암은 암벽 위 천태각에 모셔진 나반존자의 기도 영험이 많다 해서 기도객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나반존자는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뒤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중생의 복밭이 되겠다며 말세를 지키는 보살입니다.

사리(邪離)암은 말 그대로 ‘삿됨을 멀리 하는 곳’입니다. 이곳 사리암의 천태각 밑 사리굴에선 한 사람이 살면 한 사람 먹을 쌀이 나오고, 둘이 살면 두 몫의 쌀이 나왔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한 스님이 한꺼번에 많은 쌀을 얻으려고 구멍을 쑤시자 그 때부터는 쌀이 나오지 않고 물이 나왔다는 전설이 전해내려옵니다.

사리암


다른 생명도, 후손도, 이웃도 안중에 없이 오직 자신과 현세의 탐욕만으로 자연과 인간을 해치는 삶의 방식을 경책하는 사리굴 앞에서 수많은 기도객들이 끝없이 머리를 숙이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무엇을 빌고 있는 것일까요. 미륵 세상으로 안내하는 나반존자가 말 없이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청초한 한 비구니가 자신의 뭔가를 빌지는 않고, 많은 기도객들쪽을 향해 깊게 합장을 하고 나반존자 같은 미소를 머금은 채 사리굴 앞을 지나갔습니다. 천태각 위에서 머리 위로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청도/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동영상 조소영·은지희 피디

조현 기자의 한겨레 휴심정 http://we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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