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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성불할 수 없는가...

한운고학 | 2007.06.26 13:06 | 조회 2936

여자는 성불할 수 없는가?

언제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10여 년 전으로 기억된다.

어느 노비구니의 애달픈 사연을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80세가 넘은 이 비구니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임종을 앞두고 그동안 모았던 모든 재산을 보시하면서 ‘내생에는 오직 남자로 태어나 성불하는 것이 나의 간절한 서원이다’라고 토로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여자의 몸으로는 아무리 수행을 하여도 성불할 수 없고 다음 생에서 남자의 몸을 타고나야 가능하다는 것이 불교의 전래된 관념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남자는 부처가 될 수 있는데 여자는 불가능하다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성 수행자들에 대한 이와 같은 왜곡된 관념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불교의 전통적인 여성관에 대한 역사적인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불교 태동기에 붓다는 ‘여성도 아라한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또 비구니 승단도 구성하도록 허용하였다 한다.

이는 당시 사회제도에서 여성의 지위를 고려할 때 획기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불교와 자이나교를 제외한 당시 인도의 어느 전통에서도 볼 수 없는 일로 평가된다고 한다.

석가의 여성 수행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로 인하여 여성 수행자들은 초기 불교의 수행법들을 성공적으로 달성하여 최고 목표인 아라한을 성취한 예가 빈번하였다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뭇타, 수마나, 젠티, 웃타마, 마하파자파티 고타미, 굿타 등등이라 한다.

‘대애도반니원경’에 부처는 자신을 키워준 이모인 대애도와 500 비구니가 열반하는데 ‘이들은 모두 아라한이고 모두 큰 신통이 있으며 공덕이 이미 구족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붓다는 대애도 즉 마하파자파티 고타미의 사리를 들고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적고 있다.

이것은 여인의 사리이다. 본래 악한 몸으로 급하고 악하고 사납고 가벼운 마음으로 자주 변하며 질투하였다.

그러나 마하파자파티 고타미는 여인의 몸을 버렸고 남자라야 얻을 수 있는 것을 이미 얻었다.

아라한을 성취한 여성 수행자들의 열반에 대해 찬탄하면서 ‘남자라야 얻을 수 있다’라고 하는 붓다의 여성에 대한 인식이 드러나 있다.

이러한 편견이 이후에 수행하는 여성에 대한 차별을 예고하고 있다.

당시 수행자들의 수행법에 사념처(四念處)라는 관법이 주로 행해지고 있었다 한다.

사념처란 신념처(身念處), 수념처(受念處), 심념처(心念處),법념처(法念處) 4가지인데 이중 신념처란 육신이 부정하다 즉 더럽다고 관하는 방법인데 자신의 몸을 관할 때는 남녀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젊은 남자 수행자들은 애욕을 떨치기 위한 방편으로 여성의 육체를 관하는데 문제가 된다.

‘불본행집경’에 싯달타 태자가 출가하기 전날, 궁중 연회를 마치고 아무렇게나 여기저기 드러누워 잠에 곯아떨어진 궁녀들의 모양을 보면서 결심을 굳혔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일화이다.

이 경에는 대소변을 흘리면서 흐트러져 자고 있는 여인들의 추한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여성의 육체에 대한 석존의 긍정적이지 못한 관념은 항마의 장면에서 다시 부정적으로 등장한다.

이와 같은 석존의 여성관은 비구들이 수행하는데 지침이 되면서 여성 차별이 구체화되어 간다.

‘대반열반경’에 아난은 열반에 든 석존에게 공양을 올리기 위해 모인 인파속에서 휩쓸려 다칠까봐 힘 약한 비구니와 우바세 등 여성들을 먼저 공양을 올리게 한다.

그런데 다른 경에서 여성들에게 붓다의 음장상을 보인 아난의 죄를 성토하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아난이 여성에 대해 비하와 혐오감을 가진 것으로 그려지면서 다음과 같이 변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인들은 욕정이 치성하므로 세존의 음장상을 보여 “부처님과 같이 되어 지이다”라고 서원하도록 만들고자 했습니다.’

아난이 여성에게 베푼 배려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몸이 가진 욕정을 스스로 혐오하는 마음을 내고 욕정을 여윈 부처님과 같아지기를 서원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남성 중심의 이와 같은 수행론은 여성을 쾌락이나 욕망과 동일시하여 보았으며 남성의 애욕은 여성이 유혹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어서 여성의 몸은 남성의 금욕수행을 방해하는 몸이라는 관념을 끌어내는데까지 이르렀다.

한편 소마경(蘇摩經)에서 비구니 소마는 ‘깨달음의 경지는 매우 얻기 어려운 것으로 손가락 두 마디밖에 안 되는 여인의 지혜로는 능히 그곳에 도달할 수 없다’는 말을 듣는다.

이것이 초기의 소박한 여성 장애설이다.

소마는 이 말을 마설로 단정하고 수행하여 번뇌를 끊고 아라한에 이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 여성에게 깨달음에 장애가 있다는 설은 점점 체계화되어 5가지 장애설로 발전한다.

오분율(五分律)은 ‘여인에게는 5가지 장애가 있어 제석천, 마천왕, 범천왕, 전륜성왕, 삼계법왕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아함경에서는 ‘여성은 5가지 일을 할 수 없어 5가지가 된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남자는 할 수 있어 이 5가지가 된다는 것은 옳다’고 하였다.

여성에게 장애가 있다는 설은 오분율에서만 보이고 5가지가 될 수 없다는 불가설은 공통적이다.

이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성불(成佛)할 수 없다는 성불불가설이다.

대승경전의 여성에 대한 문제는 초기 경전에서 제기된 여성 성불 불가설에 대한 입장에서부터 시작한다.

여러 대승경전들은 초기 불교가 정립한 여성 성불불가설을 매우 의식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설에 대한 입장은 수용에서부터 적극적인 비판과 여성 즉신 성불설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대승경전중에서 여성 성불불가설을 수용하는 경우는 용시녀경을 들 수 있는데 용시는 불도를 얻겠다는 서원을 세우자 마(魔)가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나 ‘여인은 부처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용시는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정진하여 남자 몸을 받아 수행하겠습니다’하고 죽기위해 누각에서 떨어진다.

그러나 용시는 남자로 변하게 되고 이어 부처로부터 수기를 받는다.

여기서 용시는 남자로 태어나고자 죽음을 택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경전이 보여주는 것은 여성의 몸은 성불할 수 없다는 개념을 그대로 수용하는 입장이다.

이 때문에 여성이 남자로 변하여 성불하는 유형의 모델이 되었다.

이 변성 성불론은 법화경, 반야경, 수마제경, 대보적경, 월상녀경 등이 계승, 주장하고 있으며 유마경은 변성을 통해 성불한다는데 대해 비판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관념이 사실이든, 아니면 가부장적 전통적 인습에서 필연적으로 변질되었든, 100세의 비구니라도 새로 수계를 받은 비구를 보면 일어나서 맞아 정좌에 앉게 하고, 노비구니의 절을 앉아서 받는다.

또 비구니는 비구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팔경법(八敬法)에 눌리고 변성 성불론에 얽매인 비구니 수행자들의 가슴에 맺힌 한이 어떠하였는지 가히 짐작할 만하다.

과연 여자는 단순히 성 때문에 천대받아야하고 남자로 다시 태어나야 불도를 이룰 수 있는 것인가.

남녀 성차별의 문제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선진국가들 에서는 많이 개선되었지만 특히 종교계의 내부에서는 별로 개선된 모습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수행하는 주체로서의 남녀 성차별은 적어도 이 시점부터는 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적어도 수행하는 경우에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기 보다는 오히려 우월하다는 사례가 현저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요가의 모든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점은 쿤달리니의 각성에 있다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각성하면 아라한, 또는 성인이라 부르고 석가와 같은 성인들을 양성하는 모태라 하였다.

모든 종교도 교리의 핵심에 들어가면 이를 부정할 수 없다.

다만 각성이 너무 어렵고 드물어 현재는 모두 잊혀지고 망실되었을 뿐이다.

지난 5년 동안 쿤달리니를 각성해서 나를 찾은 사람들은 모두 7명이고 전화로만 상담하여 각성되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2명인데 이들 가운데 남자는 단 1명이고 8명은 여자였다.

쿤달리니를 각성한 사람이 여성에 압도적으로 편중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은 모두 저절로 각성된 자연 각성자이지 나의 각성법에 따라 각성한 인위적인 각성자가 아니다.

고피 크리슈나는 ‘쿤달리니의 본고장인 인도에서 각성하는 예는 1세기에 한두 명이 있을까 말까한다’고 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여성각성자가 많이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자연 각성한 남자의 경우, 비구로서 20여년을 한결같이 동안거, 하안거에 토굴생활로 일관해온 청정한 수행자이다.

이와 같이 각고의 수행을 하면 쿤달리니를 각성할 수 있다고 하였으므로 각성한 것이 당연하다고 하지만 참으로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여자들의 경우를 보면 50대 후반의 두 사람은 10여년전에 각성하였는데 각각 불교와 가톨릭 신자로 현재 자녀를 둔 가정주부들이다.

두 사람은 오랜 세월을 기도생활을 하였다고는 하지만 아이들 키우고 시부모 모시고 남편 시중들면서 기회를 보아 짬짬이 수행하였으므로 수행자라고 내세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이 두 사람은 현재 초월의 경지를 향해 정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40대 초반의 어머니이자 교사인 K의 경우, 불교를 믿고 있기는 하지만 특별히 기도나 참선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를 가져보지 못했는데 30대 중반에 갑자기 각성하여 현재 완성단계에 있다.

35세로 불교신자인 K의 경우, 나름대로 기도와 참선을 하다가 20대 말에 각성하였다.

34세의 교사인 Y의 경우, 가톨릭교회에 다니다가 29세에 갑자기 방학기간을 이용하여 참선을 하다 각성하여 나를 찾았다.

Y는 나의 지도를 받고 6년 만에 쿤달리니의 완성과 초월 그리고 무상삼매를 초스피드로 돌파하고 현재 마지막 단계인 진아의 구현을 위해 정진중이다.

전화로만 각성을 확인한 두 사람은 그 후 연락이 없어 알 수 없다.

그리고 나의 지도를 받아 각성하였거나 현재 각성중인 여성이 2명이 있다.

45세인 가정주부로서 섬유디자인업계에서 일하는 K는 20년 동안 일본계 불교를 다니면서 매일 2~3시간씩 주력 기도를 하다가 쿤달리니에 입문하여 작년 봄에 각성하고 현재 완성단계를 향해 정진중이다.

42세인 중학교 교사인 P는 어느 날 ‘나’를 의식하게 되어 3년 동안 방학을 이용하여 선방을 찾아 참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참선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대안을 찾아 방황하다가 나를 찾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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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5가지 장애가 있어서 여자의 몸으로는 성불할 수 없다는 설이나 남자의 몸으로 바꿔야 성불할 수 있다는 설이 너무 공허하게 들린다.

설사 여자는 ‘본래 악하고 급하고 사납고 가벼워서 자주 변하고 질투하기 때문’에 성불할 수 없다는 그럴듯한 설명도 붓다가 생전에 하였다는 말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남자들이 필요에 따라, 사회적 조류에 따라 그렇게 유도해서 그렇게 결론을 낸 것 같다.

여자는 이에 항거하였겠지만 힘이 미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순종하면서 많은 세월이 흐르고 쌓이다

보니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그것이 옳다고 생각된다면 옳은 것이다.

그렇지만 의문을 품고 또 저항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면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현상이 만들어 진 것이다.

그렇다면 개선해야 한다.

불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람이 윤회한다는 설을 믿는다.

쿤달리니가 완성만 되어도 윤회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을 저절로 터득하게 된다.

현재 남자라고 한다 하여 항상 남자의 몸으로 세상에 나오는 것은 아니다.

현재 보이는 현상은 자신이 선택한 역할과 배역일 뿐이다.

이 역할과 배역은 항상 인연 따라 업 따라 뒤바뀐다.

현생에는 여자지만 내생에는 남자일 수 있다.

또 과거 생에는 남자였지만 현생에는 여자일 수 있다.

내생에는 다시 성이 바뀔 수 있다.

여자로, 또 남자로 되는 것이 세상의 가치에는 큰 차이가 날 수 있다.

그러나 일관된 삶에서 보는 성의 차이는 마치 길거리의 어느 식당에서 밥 먹을 때마다 바뀌는 숟가락 같다.

성별에 집착하는 것은 그만치 2원적인 이 세계의 가치에 충실하게 집착, 또는 밀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007년 寂玄齋에서 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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