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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승 경지는 어디인가...

한운고학 | 2007.06.26 13:13 | 조회 2983

....최상승 경지는 어디인가 ....


명상의 최고의 경지를, 신을 믿는 종교는 자신들을 창조한 전지전능한 신과의 합일(合一)을, 불교는 견성(見性)을, 요가에서는 진아(眞我)의 구현을 목표로 하고 있다.

견성은 ‘불성(佛性)을 본다’는 의미로 열반경이 중국에 들어오면서 사용하기 시작되었다고 한다.
열반경은 ‘진실한 나(我)인 여래의 성품은 일체 중생이 모두 지니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만 무량한 번뇌에 휩싸여 있어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고 부처와 중생의 차이를 번뇌의 유무에 따라 구분하고 있다.
즉 현재의 나는 내 안에 부처와 똑같은 품성이 있지만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어지럽게 하고 괴롭게 하며 미혹하게 하는 정신작용 때문에 부처의 모습이 숨겨져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체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지만 선지식(禪知識)을 만나지 못해 비록 불성을 갖추고 있지만 드러내지 못 한다’고 하였다.

열반경은 ‘마땅히 알아라. 일체 중생은 모두 여래가 상주하는 성품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모든 결박과 번뇌를 영원히 떠나게 되면 여래장이 상주(常住)하는 성품을 드러내게 되어 일심(一心)을 일으켜 묘과(妙果)를 얻는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번뇌를 끊으면 일심을 이루게 되고 그래서 불성이 드러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불성은 중생 누구든지 모두 다 갖추고 있다는 명제아래 불성 구현을 이루는 방법으로 견성이 불교 명상의 최고의 목표가 되었다.

이와 같이 번뇌가 사라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한 마음(一心)을 이루게 되고, 숨겨진 불성이 드러나면 부처가 된다는데 그동안 조사(祖師)들과 선사(禪師)들은 어떤 경지들을 체험했고 무엇이라고 밝혔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육조단경을 통해 선불교(禪佛敎)의 종지(宗旨)를 대종사인 6조 혜능(惠能)으로부터 들어보자.

여러분, 내가 여기서 해설하는 법문은 선대 조사님들 이래로
첫째로 무념(無念)을 들어 종지(宗旨)로 삼고, 무상(無相)으로 본체(本體)를 삼고, 무주(無住)로써 근본(根本)으로 삼는다.
무상이란 것은 모습이나 형체를 인정하면서도 그 모습에 사로잡히지 않음을 말한다.
무념이란 것은 사물을 생각하면서도 그 생각에 얽매이지 않음을 말한다.
무주란 것은 사람의 본성이기 때문에, 세상의 선악이나 미추(美醜) 또는 원망이나 친밀, 말의 자극성이나 속임수, 이 모두는 가짜 모습으로서 실체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원수를 보복할 생각을 말고 순간순간의 의식 속에서 지나간 일을 회상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 내용은 선불교의 신조(信條)와 교의(敎義)를 밝히는 것으로 바로 견성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무념, 무상, 무주는 견성경지에 도달하면 세 가지의 의미를 한꺼번에 알아차리게 되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몸에 배어 실천하는 자리이다.

성철(性徹)스님이 ‘선문의 정안종사(正眼宗師)중에 숙면일여(熟眠一如)를 뚫고 지나가지 않고서 견성했다고 말한 사람은 없으니 그들은 구경각을 성취했기 때문’이라고 지칭한 최고의 선지식들이 말하는 최상의 경지를 들어보자.

5조 홍인(弘忍)은..
‘최고의 깨달음이란 반드시 당장에 자기의 본래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음으로써 자기 본성이 불생불멸임을 알아야 하며 그 언제라도 일념일념(一念)으로 스스로 만사에 막힘이 없고 하나의 진실이 일체의 진실이 되고 모든 대상(境)은 스스로 있는 그대로 이며 이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라야 진실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꿰뚫어 볼 줄 안다면 이것이 바로 다름 아닌 최고 깨달음의 본체(自性)가 된다’고 하여 일념, 즉 한 생각을 말하고 있다.

6조 혜능은...
‘이 법을 깨친 자는 생각이 없다.
기억과 집착이 없어서 망념이 일어나지 않고 자기의 진여 본성을 사용하여 지혜로 관조하므로 일체법을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으니 이것이 견성이며 성불하는 길이다’고 하여 무념을 말하고 있다.
또 ‘다만 자기 마음에 항상 바른 견해가 일어나 번뇌 망상이 물들이지 못하는 것이 곧 견성이다’고 하였다.

대승불교의 시조(始祖)인 마명(馬鳴)은 기신론에서...
‘중생이 착실하게 무념을 관찰할 때는 곧 부처님 나라로 가는 지혜로 본다’라면서 ‘무념을 이룩하면 곧 마음의 생주이멸(生住異滅)을 터득한다’ 또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마음에 생각이 떠나 마치 빈 하늘과 같이 된 것이니 이것을 여래의 평등한 법신이라 한다’고 무념을 말하고 있다.

신회는 ‘만약 심심(甚深)법계에 들어서려는 자는 곧바로 일행삼매로 들어가라.
반야바라밀은 곧 일행삼매이다’라고 말하고 이어 ‘이 무념은 일체의 경계가 없다.
만일 일체의 경계가 있다면 그것은 곧 무념과 상응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분! 여실히 터득하는 자는 심심법계에 들어 설 수 있다.
이것이 곧 일행삼매다’고 하여 무념을 말하고 있다.
또 ‘유무(有無)를 다 버리고 중도마저 없어야만 무념이 된다.
무념은 곧 일념이고 일념은 곧 일체지(一切智)이며 일체지는 곧 심심 반야바라밀이다’라고 하여 무념과 일심을 말하고 있다.

삼론학파의 대성자(大聖者)인 길장(吉藏)은 ..
공(空)을 논하면서 ‘불성을 보아 필경에 청정하여 번뇌가 없는 것을 공이라 한다’고 하여 무념을 공이라 하였다.

청량초(淸凉鈔)는..
‘마음이 나면 허망이요 마음이 나지 않으면 부처다.
마음이 난다함은 잡념만 나는 것이 아니라 비록 보리 열반과 마음을 관찰하여 성품을 보는 현묘한 마음이 나는 것도 마음이 나는 것으로서 모두 망상이 된다.
잡념과 망상이 영영 적멸해야 비로소 나지 않음(不生)이라 이름 한다.
여기서 적멸과 관조가 눈앞에 그대로 나타나니 어찌 부처라 이름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달마비”에서 말하였다.
마음이 있으면 영겁토록 범부에 머물러 있고 마음이 없으면 찰나에 정각을 성취한다’고 하여 무념을 말하고 있다.

원효소(元曉疏) 현수의기(賢首義記)는..
‘불지(佛地)는 무념이다’라 말하고 ‘견성이란 곧 무심이며 구경각이며 대열반이다’라고 무념과 무심을 말하고 있다.
유가론(瑜伽論)은..
‘오직 무여열반의 경계에서만 모든 망심이 없어지므로 무심의 지위라 부른다.
그 나머지 지위는 전식(轉識)이 전혀 없기 때문에 임시로 무심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제8아뢰야식이 아직 다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유심(有心)의 지위라 이름 한다.’ 하여 무심을 말하고 있다.

원오는..
또 ‘마음자리에 털끝만큼도 새나감(번뇌)이 없어서 한번 깨침에 영원히 깨쳐 한결같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 오묘한 마음은 변하거나 달라짐이 전혀 없으니 이것을 두고 사람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견성 성불케 한다고 한다’고 무심을 이야기하고 있다.

열반경은..
‘열반이란 아무것도 없는 진멸(盡滅)이 아니라 모든 생사번뇌의 원가(寃家)를 벗어난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번뇌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번뇌가 아예 떠오르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위의 글들은 경전이나 조사, 대 선지식들이 밝힌 견성, 열반, 성불, 무생, 돈오, 묘각,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등등 낱말은 다르지만 뜻은 한가지인 최고의 경지를 설명한 내용들이다.

그런데 이 내용들을 보면 모두가 무념과 무심, 일심 등등 마음이 이와 같은 상태에 이르면 최상의 경지가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렇다면 인도의 요가 명상가들은 최고의 경지를 어떻게 표현했는지 보자.
마하리시 마헤시는..
‘존재는 초월의 성격이므로 일상적 오관의 감각으로는 느낄 수 없다.
감각적 지각이 끝났을 때에만 존재의 초월 자리에 다다른다.
오관을 통해서 사물을 느끼는 동안에 우리는 상대적 세계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관의 감각을 통해서는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감각을 이용하든지 먼저 오관을 통한 경험의 끝에까지 가야한다.
그리고 그 끝을 초월하면 아무 것도 느끼지 않는 의식 상태에 이른다’고 무심을 말하고 있다.
이어서 무심의 자리에서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가장 안쪽의 미세한 부분의 경험까지를 초월할 때에는 경험하는 대상, 경험의 그 과정 자체까지도 포함하여 일체가 느껴지지 않고 경험자만이 홀로 남는 상태에 이른다.

라마나 마하리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진아를 깨닫게 되면 무엇을 보게 됩니까?’라는 질문에……
보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이 그냥 존재할 뿐이다.
깨달음의 상태란 뭔가 새로운 것을 얻거나 멀리 떨어져있는 어떤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지금 존재하고 또 항상 존재해 왔던 그 상태로 그냥 존재하는 것이다.
무심을 말하고 있다.
마하리시는 또 ‘감각적으로 또는 생각을 통해서 체험하는 나’는 진정한 “나”가 아니며, 스스로 “나”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모두 부정한 다음에 남는 순수한 각성이 진정한 “나” 즉 진아이다.
이 진아는 개체적인 존재와 혼동하여서는 안 된다.
개체적 자아는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마음이 거짓되게 만든 것이고 진아를 체험하지 못하도록 오히려 방해하는 것이다.
진아는 항상 실재하지만 우리가 있는 그대로를 분명히 알 수 있을 때는 오직 스스로를 한계 짓는 마음이 사라졌을 때뿐이다.
마음이 사라져서 진아가 그 모습을 드러낸 상태가 바로 깨달음이다’라고 말하여 무심이 즉 진아임을 밝히고 있다.
불교 선종의 입장이나 요가의 입장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는 과거에서 현재까지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최고 명상집단의 구경점(究竟點)이 무념, 무심, 일념 등 오감을 초월하는 자리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수천 년 동안 헤아릴 수없이 많은 수행자들이 그토록 추구했던 명상의 종점이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자리였다.

이 자리는 생각의 기능이 정지됨으로써 일어나게 되는 오감(五感)의 감각을 초월하는 자리이다.
물론 인간의 모든 기능은 오감의 촉감과 이 때문에 일어나는 생각과 행위들이 그 전부여서 그 한계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구경점이 과연 무념이나 무심 등 불교나 요가에서 말하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자리일까?
이 자리마저도 인간에게는 하늘같이 높아 피가 말리는 수행에도 다가서기가 지극히 어렵다.

그렇지만 무심이나 일심의 자리는 최고 경지의 자리가 아니다.
이 자리는 이제 겨우 인간의 차원을 뛰어넘은 초월의 초입에 들어섰을 뿐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상대세계인 물질 세계에 알맞도록 구성되어 있을 뿐 비물질 세계에는 부적절하므로 최고 경지의 자리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 무심도인(無心道人)이란?.....................

이 같은 최고의 경지, 즉 견성에 도달하면 세상 사람들은 무심도인, 무애인(無礙人), 진인(眞人), 또는 대자유인이라 부른다.
이 도인들은 깨달음을 성취한 후에 일반 사람들과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알아보자.
선가 서적에는 이 깨달은 자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을 찾기 어려워 우선 요가 쪽의 사례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라마나 마하리시는 ‘인간은 “육체가 나”라는 생각을 넘어 섰을 때 깨닫게 된다.
생각이 없으면 행위라든가 행위자라는 생각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깨달은 사람에게는 카르마(業)가 없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는다.
이는 깨달은 사람이 체험하는 바이며 이런 체험이 없다면 그는 깨달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마하리시는 또 ‘살아가며 행위 하는 데에는 마음을 사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진인은 어떻게 마음 없이도 살아가며 행위를 할 수 있는가는 진인은 자신이 행위자라는 관념이 없이 행위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육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비록 육신이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그 자신은 아무 행위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라마나 마하리시는 육체의식을 초월했을 때 깨닫게 되고, 이 깨달음으로 생각이 일어나지 않은 경지에 도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생각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행위는 카르마를 축적시키지만 생각이 일어나지 않은 공의 상태를 성취하면 카르마가 모두 녹아버린 것으로 보고 있다.
어떤 행위를 하기위해서는 하고자하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생각이 없으면 ‘나’라는 자아의식이 없고 자아의식이 없는 행위는 그 행위를 하는 주체인 ‘나’가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생각이 없는 상태에서 한 행위는 행위자가 없으므로 행위가 있다 하더라도 행위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유지 크리슈나무르티는 자신의 깨달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제 몸에서 기능하고 있는 것은 생각에 때 묻지 않은 원초의 의식입니다"
"중재자가 없으면 감각은 서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감각을 해석하는 번역이 이루어지질 않죠"
"감각은 그저 감각으로 남습니다"
"그것이 감각이라는 것조차 모릅니다"
"저는 누군가 이야기하는 것을 봅니다"
"저의 눈은 말하는 사람의 입을 봅니다"
"귀는 소리의 울림을 받아들입니다"
"이 두 가지의 사실을 연계시켜서 그 사람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하는 판단을 내리는 프로그램이 제 안에는 없습니다"
"샘이 솟으며 물소리를 내는 것을 보아도 그 두 가지는 연결되지 않습니다"
"저의 발을 내려 보아도 나의 발이라는 판단이 들지 않죠"
"저는 움직이고 있는 것이 무엇이지 모릅니다………"
"자신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고 있어도 몇 시인지 모릅니다"
"그것이 시계라는 것도 모르죠"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의문이 떠오르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라며 자신의 현상을 설명한다.

유지는 그러나 ‘제가 배운 모든 지식은 필요하지 않으면 배후에 남아 있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무엇인가 물으면 지식은 쏜살같이 되돌아옵니다.
그래서 대답을 하게 되죠.
그리고 대답이 끝나면 다시 비지식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됩니다’라고 말한다.
유지 크리슈나무르티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설명하고 있다.

생각이 이루어지려면 감각기관이 외부의 정보를 머리부분의 아스트랄체에 보내고 이 정보를 두고 아스트랄체와 코자르체가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협조하여야 한다고 한다.

유지 크리슈나무르티는 깨달음을 이루면 감각기관과 아스트랄체와 코자르체의 삼각 축으로 이루어져야할 의식 생성구조에 어떤 변동이 일어나, 생각이 일어나지 않아서 벌어지는 현상을 말하고 있다.
즉 초월의 경지를 넘어가면 감각기관이 사물이나 움직임을 포착하지만, 이 정보를 경우에 따라 대뇌의 아스트랄체에 보낼 수 없게 된다.
눈은 사물을 보고 있지만, 귀는 어떤 소리를 들었지만, 이 듣고 보았다는 정보를 두뇌로 보낼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그래서 ‘눈은 보지만, 귀는 듣지만’하는 감각기능은 있지만 정보가 두뇌로 전달되지 않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이름 없는 도인이 말한 그런 경지이다.

그렇지만 정보와 분석체계가 항상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질문하거나 어떤 행동을 취할 필요가 있을 때는 의식을 형성하는 삼각체계가 다시 정상적으로 가동하게 된다. 과거의 지식이나 기억이 소멸된 것이 아니라 떠오르지 않을 뿐, 필요하면 얼마든지 다시 사용이 가능하다는 점을 유지는 설명하고 있다.

선종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견성하면 무심, 무념에 통달하였다 하여 무심도인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무심도인이란 무심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고 무심경지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은 자리, 즉 선가(禪家)의 표현을 빌리면 견성의 경지이다.

단경(壇經)에 의하면 ‘무념 법을 깨친 자는 생각이 없다.
기억과 집착이 없어서 망념이 일어나지 않고 자기의 진여본성(眞如本性)을 사용하여 지혜로 관조하므로 일체법을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으니 이것이 견성이며 성불하는 길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대주혜해(大珠慧海)와 어느 수행자와의 문답을 보면 ‘무엇이 바른 견해(正見)인가?’
‘보되 보는 바가 없음을 바른 견해라 한다’ ‘무엇을 가리켜 보되 보는바가 없다 하는가?’

‘일체의 색(色)을 보고도 싫음과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다.
싫음과 집착이 없다는 것은 사랑과 증오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보되 보는바가 없다고 한다.’ 하였다.

대주혜해의 생각은 유지 크리슈나무르티의 입장과 다름이 없다.
보되 보는 바가 없다는 것은 유지 크리슈나무르티의 경우와 같이 오감이 채집한 정보가 두뇌와 연결이 안 되어 생각을 일으키지 않은 것을 말한다.

그리고 옳고 그른 것(正邪), 좋고 나쁜 것(好惡), 사랑과 미움(愛憎) 등등에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보되 보는 바가 없는 경지까지 오는 동안 얻게 된 일종의 부산물이다.

사람이 인간의 속성인 탐착(貪着)을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놓아라’ 한다고 해서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육근(六根)의 대상이 탐착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더 이상 그것들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내가 체험한 바에 의하면 세상에서 말하는 무심이라는 특이한 체험은 유상삼매(有相三昧)중의 초월의 경지 전후에서 시작된다.

초월의 경지는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들을 꾸준히 쳐다보면서 시작된다.
생각을 쳐다보면 보는 즉시 그 생각은 사라진다.
그러면 곧바로 다른 생각이 일어난다. 쳐다보면 사라진다. 이와 같은 일들이 반복된다.
......
그래서 생각과 생각 사이에 공간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이 생각을 계속 쳐다보면 생각 사이의 공간이 점점 넓어지게 되는 것을 알게 된다.

생각과 생각사이의 공간이 어느 정도 벌어졌을 때, 생각은 생각인데 생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이상한 현상, 즉 생각이라고 느껴지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생각이 되다만 생각으로 느껴지는 것이 볼록볼록
올라오다 사라지는 현상을 체험하게 된다.

마치 팥죽을 쑬 때 표면이 끓기 전에 볼록볼록하고 오르다가 꺼져버리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이것을 선가에서는 미세망념이라고 하는 것 같다.

원효(元曉)의 기신론소(起信論疏)에 이에 대한 언급이 있어 적어둔다.
‘무명업상이 염(念)을 움직이는 것이 망념 가운데서도 가장 미세하므로 미세망념(微細妄念)이라 부른다.
이 미세망념이 전부 없어져서 영원히 그 흔적이 없으므로 “영원히 떠났다”고 한다.
이 미세망념을 영영 여의었을 때만이 정확히 부처의 지위에 머물게 된다.……
이 지위에 이르러서는 무명이 완전히 다 없어져서 일심(一心) 본원에 돌아가 다시는 일고 꺼지는 움직임이 없으므로 성품을 본다(得見心性)고 말 한다’ 하였다.

생각은 생각인데 생각이 미처 되지못하고 볼록볼록하는 현상이 한동안 계속되다 사라지면 의식 활동이 완전히 정지된 상태가 나타나게 된다.
이때 정지된 의식의 상태는 아주 맑고 선명하다.
그야말로 의식 활동이 전혀 일어나지 않지만 이 일어나지 않는 가운데 선명한 의식은 남아있으며 샛별처럼 아주 뚜렷하다.

바로 무념, 무심의 상태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견성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이 무념, 무심의 견성경지는 곧 이어 여기에 도착했다는 인가를 받게 된다.
즉 육체의식을 초월했다는 증표를 받게 되는데 ‘나’라고 느껴지는 둥근 빛의 광구(光球)를 보게 된다.
이 광구는 ‘나’라고는 의식되지만 나와 하나(合一)가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절벽에서 떨어지듯 쑤욱 가라앉는 느낌을 받으면서 삼매에 들어가고 명상을 끝내고 나오면 내 몸이 내가 아닌 고목의 등걸이나 바윗돌처럼 인식되고 내가 그 위에 마치 얹혀있는 것같이 느껴지게 된다.

여기가 수행자들이 그렇게 간절히 희구해 왔던 오감의 벽을 뛰어넘은 초월의 경지이며 견성이란 말의 ‘부처의 성품을 본다’는 그 성품의 실마리를 찾게 된 셈이다.

.....몸과 별도로 나는 존재하고 있다는 확신이 자리 잡는 순간이고 공(空)에 대한 신념이 생기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 자리는 물론 인간의 의식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경지이다.

불교나 요가에서는 이 경지를 수행의 최고 목표점으로 단정하고 이 경지에 대한 표현이 부처를 이뤘다든지 구경열반지라는 등 최상의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이 자리가 끝은 아니다.

부처의 자리이기는커녕 그저 사람의 오감의 한계를 겨우 벗어난 자리라 할 수 있다.
이제야 물질 세계의 육체감각을 뛰어넘어 비물질 세계의 초입에 들어선 것이다.
아직도 갈 길은 멀다.
기껏 다섯 가지 감각 속에 움츠리고 앉아서 생각으로 꿰맞춘다고 될 일이 아니고 알 일도 아니다.


..............이제 무심도인(無心道人)이 살아있는 동안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보자.....................

깨우침이나 신과의 합일을 위한 모든 수행은 일단 무심(無心)의 경지로 모아진다.
무심이란 쉽게 말해 두뇌에서 생각이 일어나지 않아 생각이 없다.
생각하는 작용이 정지되었다는 개념이다.

처음에는 명상을 하는 동안 삼매(三昧)에서 생각이 끊기고 이와 같은 체험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현실생활에서도 두뇌의 의식 활동이 상당한 시간 정지하게 된다.

끊임없이 계속되어 떠오르는 생각이 어느새 사라져 전혀 머릿속에 생각이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물을 보았다고 해도 눈은 쳐다보지만 중추신경에 그 사물의 영상을 전달해야 의식이 되고 생각이 되는데 그 전달 작용이 안 되는지 보이지만 보는지 모르고 당연히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

머리는 항상 맑고 투명하다.

우선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므로 좋아할 일도, 고민이나 번민할 일이 없다.
일을 하게 되면 허리가 아프거나 어디 불편한 곳이 있으면 모를까 계속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이 없어져 버린 현상을 본인은 까맣게 모르고 있다.
주위에서 지적을 해주어서야 알게 된다.

누가 말을 걸면 머리는 전혀 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에 대한 답을 잘 한다.
약속한 시간이나 할 일이 있으면 머리가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잘 알고 행한다.
과거의 기억이 없어지지도 않는다.
대화중에 과거의 일로 기억이 나지 않아서 어려움을 느낀 적은 별로 없다.
일상사에서 책을 보든, 영화를 보든, 당면한 대부분의 일에서는 보아도, 들어도 특별한 것이 아니면 기억되는 것이 별로 없다.

그래서 새로운 공부를 하려면 쉽지 않다.
그러나 철학이나 불교서적같이 난삽한 서적은 과거에는 이해하는데 어려웠을지라도 신기하게 쉽게 이해된다.
마치 대학생이 중학교 학생들의 교과서를 보는 것과 같이 수월하다.

이제 혜능이 산문(山門)을 열면서 선언한 종지를 보자.
무념을 종지로 삼고 무상을 본체로 삼고 무주로 근본으로 삼는다고 하면서 무상이란 모습이나 형체를 인정하면서도 그 모습에 사로잡히지 않음을 말한다 하였다.
무념이란 사물을 생각하면서도 그 생각에 얽매이지 않음을 말한다 하였다.

무주란 사람의 본성이기 때문에, 세상의 선악이나 미추 또는 원망이나 친밀, 말의 자극성이나 속임수, 이 모두는 가짜 모습으로서 실체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원수를 보복할 생각을 말고 순간순간의 의식 속에서 지나간 일을 회상하지 않음을 말한다고 설파하고 있다.

앞에서 요가의 성자들이나 경전들이 말하는 최고의 경지는 무심이나 무념, 또는 일심으로 일컬어지는 생각 기능이 정지된 상태라고 했는데 혜능은 ‘인정하면서’ ‘생각하면서’ ‘실체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회상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가.
앞에서는 눈은 보아도, 귀는 들어도 거울처럼 비추기만 할뿐 생각을 일으키는 작용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물을 접했을 때의 단순한 느낌인 ’저것이 무엇이다‘라는 생각 이전의 인식작용은 실생활에서 상당히 체험하고 있다.
그런데 혜능은 인식작용을 넘어 분별작용을 포함하는 생각이라는 개념으로 말하고 있다.

한마음의 경지에서 본 현상세계에 대한 가치가 환상이나 거품 정도로 의미가 없는 하찮은 것으로 의식체계가 완전히 해탈자의 것으로 바뀌어 있다면 대상에 얽매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긴 하다.

어쨌든 일단 가치를 분별하면 속박되지 않을 수 없다.
선악이나 아름답고 미운 것, 좋고 나쁜 것, 애착, 욕망 등등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오욕칠정(五慾七情)이 저절로 그러나 천천히 떨어져 나가므로 현재의 행위나 과거 기억으로 자랑스러워하거나 괴로워할 일이 없다.

좋아할 일도 없고 행복할 일도 없으며 괴롭거나 슬프거나 외로울 일도 없다.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인가 의지하고 싶다는 허전함도, 불안함도 사라져 신(神)에 대한 기대고 싶은 생각은 물론이고 외경심이나 두려움도 사라져 버린다.

신으로부터 자유스러워 지고 자신의 마음으로부터도 자유스러워 진다.
아무런 제약이나 거리낄 것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치가 있다고 느껴지는 일이 없게 된다.
따라서 추구해야 할 일이나 목표도 없다.

바로 무심도인이면서 걸림이 없는 무애인이고 대자유인이다.

선가에서는 깨달음을 일회성(一回性)의 특수한 경험이라고 한다.
사람의 정상적인 육체에서 생각이 끊어진다는 것은 인간 차원의 벽을 넘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 경험은 지극히 강렬할 것이다.
어렵지만 사람의 몸으로 그 자리에 간다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자주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지만 천우신조로 어쩌다 갈 수 있다고 해서 일회성이라는데 수긍할 수는 있다.

나의 수행경험이나 후학(後學)을 가르치면서 느낀 점은 견성이후 무상삼매를 지나 상당한 기간을 여러 차례 삼매를 오가며, 그러면서 또 많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오욕칠정이 서서히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보아 한번 경험한다고 해서 과연 무심도인의 경지를 체득하게 되는 것인지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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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寂玄齋에서 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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