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자유게시판

자유로운 주제가 가능한 공간입니다.
그러나 부적절한 게시물이나 글은 삼가해 주시기 당부드리며, 광고성 글이나 부득이한 경우 삭제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참"나"란 있는가..

한운고학 | 2007.06.27 09:12 | 조회 2357

...............참 나’란 있는가?...................

견성의 경지에서도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하였다.

불교의 경전이나 선가(禪家)가 남긴 책들에서 내가 볼 수 있었던 최고의 경지는 무념과 무심, 또 비사량으로 불리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서도 뚜렸한 의식만이 존재하는 한마음의 자리이다.

이 자리가 견성이고 성불이며 무생(無生)이며 돈오이고 무여열반이고 묘각이라 하였다.

참으로 이 자리가 깨달음의 종착지인가!

나는 후학들 때문에 할 수없이 떠밀려 요가와 선에 관한 서적들을 읽으면서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체험한 바로는 견성이라고 선가에서 주장하는 한 생각의 자리를 지나서도 그 또렷한 의식마저도 소멸되는 자리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다음에는 ‘나’라고 여겨지면서 나의 의식이 빨려 들어가 하나가 되는 휘황하고 싸늘한 빛을 발하는 투명한 광체(光體), 즉 참 나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체험에 대해 나는 불과 몇 권되지는 않지만 내가 본 경전에서는 찾을 수 없었고 참선이나 요가 서적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내가 쿤달리니의 힘을 빌려 명상을 한 나머지 사람들이 전혀 가보지 못한 곳까지 너무 멀리 온 것은 아닐까?

아니면 선가에서 경계하는 무기공(無記空)에 빠져 엉뚱한 헛것을 본 것은 아닐까?

아무리 쿤달리니를 통한 명상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요가의 경전을 통해 전해져 왔고 나 혼자만 각성한 것도 아닌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딘가에는 견성의 자리라는 무심의 경지보다 더 깊은 경지에 대한 어떤 단서가 있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기대가 나를 안타깝게 하였다.

이런 이유로 쿤달리니에 관한 이 책을 저술한다는 것이 참으로 망설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2006년 5월초 시간이 남아 국립도서관에 들러 무심코 들쳐본 열반경에서 그 근거를 찾았다.

여기저기를 뒤적거린 것이 아니고 서가에서 책을 꺼내들고 책상 있는 곳으로 가면서 적당히 중간쯤 펼쳐 보는데 눈이 번쩍 띄는 내용이 있었다.

여래가 불법에는 내가 없다고 말하였으니 중생을 조복하기 위한 것이며, 시기를 아는 까닭이니라.

그래서 나랄 것이 없다(無我)고 하다가 인연이 있어서 또 내가 있다(有我)고 하였으니 저 명의가 우유의 약되는 일과 약되지 않는 일을 잘 아는 것과 같은 것이고, 범부들이 억측하는 나라는 것과는 같지 아니하니라.

범부나 어리석은 사람이 나라고 억측하는 이는 혹은 크기가 엄지손가락 같다 하고 혹은 겨자씨 같다 하고 혹은 티끌 같다고 하거니와 여래가 말하는 나란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모든 법이 내가 없다고 하지만 진실로 내가 없는 것도 아니니 어떤 것이 나인가.

만일 어떤 법이 진실하고 참되고 항상(恒常)하고 주재가 있고 의지가 있어서 성품이 변하지 아니하면 이것을 나라고 할 것이니, 저 명의가 우유약을 잘 아는 것 같으니라.

여래도 그와 같아서 중생을 위하는 까닭으로 모든 법 가운데 진실로 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 너희 사부 대중은 이렇게 이 법을 닦아 익힐지니라.

「哀嘆品」

이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여래가 내가 없다고 하는 무아(無我)를 설한 것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아 전부를 밝힌 것이 아니라 형편상 그 일부인 무아만을 방편으로 가르쳤다는 의미이다.

무아라 하였다가 다시 내가 있다고 ‘참 나’(眞我)를 말하면서 사람들이 혹 잘못 알까 염려하여 이는 세상에서 말하는 ‘나’란 개념이 아니라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따라서 모든 법에 무아라고 하였지만 그 뒤에는 진실하고 참되고 상주하여 불변하고 성품이 변하지 않는 ‘참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설한 것이다.

시기를 아는 까닭이란 정상적인 사람의 정신과 육체로서는 무심의 경지조차도 이르기가 지극히 어려운데 이보다 훨씬 깊은 경지인 진아의 경지를 어떻게 세상에 내놓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무심의 경지를 넘어 진아의 경지까지 가기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쿤달리니인데, 이것은 수행자가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한다 해서 누구나 되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한둘 정도의 극소수 사람들

만이 각성될 뿐이다.

그런데 각성한 이들도 완성이 되어야 하고 거기다가 명상과 결부시켜 수행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곳이어서 이를 드러내 놓고 밝힐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시기가 되어 쿤달리니 각성법이 누구나 어렵지 않게 될 수 있어서 일반화 된다면 가능할 텐데 하고 애석한 마음을 열반의 때를 맞아 고백한 내용이라 생각된다.

이로 미뤄 세존께서 쿤달리니를 각성하고 완성하였으며 쿤달리니를 바탕으로 명상을 하여 성도하였음이 증명된 셈이다.

진아의 자리는 온전한 사람의 육체와 정신의 조건으로는 접근이 전혀 불가능한 곳이다.

여래성품에는 진아에 대한 부연 설명들이 또 있다

이 구절은 무아행(無我行)을 닦아 아상을 없애고 나면 열반에 든다고 하는 것은 세상에서 ‘나’라는 소견을 없애주기 위해서 무아법(無我法)을 방편으로 가르쳤다는 것이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무아법을 닦는 것도 참으로 어렵다.

거기다 진아까지의 수행과정을 내 놓으면 중생들이 모두 겁을 먹고 두려워 할 것을 우려하여 생전에는 차마 말하지 못하다가 열반에 임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간절한 마음을 그리고 있다.

무아법을 닦고 난후 여래의 성품, 즉 ‘참 나’가 분명히 있다고 설한 것이다.

내가 없다는 무념이나 무심 등 한 생각으로 대변되는 견성 또는 초월의 자리는 그런대로 조사들과 대덕들에 의해 그 실상이 상당히 밝혀져 현재에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열반경에서 세존께서 존재한다는 ‘참 나’에 대해서는 내가 불민해서겠지만 어떤 책에서도 이 구절을 인용한다든가, 또는 어떤 방법으로든 접근 하려는 노력을 보지 못하였고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견성의 자리를 지나서 성성한 의식마저도 완전히 소멸하는 자리가 있는데 이 자리는 온전한 사람의 몸으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자리이다.

일심(一心)의 견성의 자리도 사람으로서는 거의 갈 수 없는 자리인데 이 자리보다 훨씬 깊고 깊은 곳을 사람으로서 어떻게 이해나마 하겠는가.

나는 이 자리를 무상삼매라 부르고 있으며 생각이 일어나지 않은 채 또렷한 의식만이 자리한, 그런 개념도 완전히 소멸되어 적멸의 상태, 즉 진공(眞空)을 체험하게 된다.

이 무상삼매를 체험하면 곧 이어 그 증표로 진아를 체험하게 된다.

이상의 열반경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세존께서는 견성보다 훨씬 더 수승하고 깊은 경지인 진아를 설한 것이 틀림이 없다.

세존께서는 언제인가 올 후학이 길을 잃고 헤맬 것을 걱정하시고, 뿐만 아니라 최종 종착점인 진아의 경지까지도 이정표를 세워 흔들림 없이 정진하도록 이미 배려를 하신 것이다.

이 맥락에서 보면 금강경과 반야심경은 세존께서 공부를 이루고 난후 자신이 겪었던 육체적 정신적 진화과정을 술회한 내용임이 틀림없다.

나는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이런 이유로 후학들에게 공부의 지침으로 삼도록 권유하고 있다.

금강경과 반야심경은 바로 수행자가 무상정등정각을 이뤄 진인(眞人)이 된 다음 자신의 변화된 마음, 의식, 사고방법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살면서 대응하는 모든 것을 기록한 내용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 두 경은 수행자들이 공부하기 위해서 간직하고 본받아야 할 스승이자 교과서로 여겨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반야심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관자재보살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세음보살이라고들 생각하고 있다.

물론 틀렸다고 하는 말은 아니다.

관자재보살이 고유명사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고 보통명사라 하여도 틀린 말이 아니다.

관자재보살은 쿤달리니를 각성, 완성하고 초월단계를 넘어 유상삼매를 마무리하고 무상삼매를 거쳐 스스로 어떤 제약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실상을 관하는 자를 말한다.

고유명사가 아니고 일반 보통명사라는 개념이다.

이 관자재보살이 깊은 삼매에 들어보니 이제까지 겪고 있던 모든 현상들이 인연에 의해 생겨난 현상(有爲法)들로서 실존이 아닌 허망한 꿈같은 것이고 물위에 뜬 거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현상 때문에 파생된 모든 괴로움과 재난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의미이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색(色)이란 세상 물질의 모든 형태와 그로 인해 이뤄지는 모든 움직임과 변화들, 표현을 달리 하면 사람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모든 물질적 현상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본다.

세상의 모든 물질과 현상은 인연에 따라 생겨나므로 거기에 내가 있을 수 없고 실체나 본질이 없다고 해서 공이라 말한다.

이 색과 공에 대해서는 양자물리학에서 이미 정의를 내렸으므로 여기 소개한다.

모든 물질을 형성하는 것은 분자이며 이 분자는 원자들이 모여 이루어진다.

원자는 다시 딱딱한 물질인 핵과 그 주위를 도는 전자로 이루어진다.

핵을 쪼개면 소립자가 되는데 이것이 진동하고 있는 에너지 덩어리이다.

따라서 물질을 구성하는 최소단위인 소립자가 진동하는 에너지 덩어리라면 물질과 에너지의 차이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곧 에너지가 물질이고 물질이 에너지이다.

다만 하나의 물질이 시간에 따라 어떤 때에는 이런 형상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다른 형상을 하여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물질이라고 인식하는 형태가 되었다가 인식할 수 없는 형태로도 변한다고 한다.

이렇게 변전하는 현상을 발견해낸 사람들이 양자역학자들이다.

이들은 고체, 액체, 기체로 된 물질의 3가지 형태 외에 네 번째 형태인 프라즈마를 발견하였는데 이 때문에 스티븐 호킹 교수는 소립자를 연구하는 물리학자들이 발견해 낸 것이 불교의 기본개념을 증명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한다.

존재하는 모든 물체는 성주괴공을 통해 있다 없다 하므로 보이는 것은 형체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고(色卽是空) 형체가 없다 해도 다시 물체로 변화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空卽是色).

이 때문에 색은 그 자체에 본질적인 주체가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색이므로 주체, 즉 나라고 할 것이 없으므로 오감으로 받아들인 삼라만상의 모든 감각과 느낌, 이로해서 만들어진 생각과 행동, 의식도 결국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내용은 일반적으로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다.

사람들은 현재 자신은 감각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므로 자신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도 ‘내가 없다’고 하는 것은 명상 가운데 초월의 경지, 즉 견성의 경지에서 생각의 기능이 완전히 단절된 ‘나와 너’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나’가 존재한다는 의식마저도 단절된 원초적인 의식만이 남게 되는 자리가 있어서 이다.

이 자리에 서서보면 “나”라는 의식이 없으므로 내가 없다는 무아설(無我說)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자리는 내가 존재하는 자리가 아닌 공의 자리이다.

따라서 이 차원에서 본다면 색이 공이 아니고 공이 색이 아니며 색이 곧 공이고 공이 즉 색이다.

의식하는 기능이 완전히 정지된 선명한 원초적 의식이 곧 공이라고 하지만 이 공은 바로 색을 창조할 수 있는 원동력을 가진 공이기도 하다.

금강경의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도 색이 색이 아님을 보면 여래를 본다 하였는데 바로 공을 의미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바로 여래를 본다고 하였으나 여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여래를 볼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즉 오감으로부터 벗어나서, 육체를 가지고 있으면서 초월의 세계에 진입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구절은 한 생각의 자리에 들어서면 있다 또는 없다고 하는 개념은 생각이 만들어 낸 산물이라는 이치를 알게 되고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원초적 의식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 문단, 즉 색즉공, 공즉색의 차원에서의 깨달음은 생겨남도 아니고 없어짐도 아니며, 더러워지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는 초월세계에서 본 물질세계의 기본적인 가치 체계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그치게 된다.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앞의 문장은 색은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라 하였는데 여기서는 공중무색 즉 공 가운데 색이 없다고 하였다.

수상행식도 없다 하였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앞의 색즉공, 공즉색은 유상삼매의 견성경지에서 체험하는 현상이고, 공중무색은 무상삼매에서 체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경지의 차원이 상당히 격상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상삼매에서는 유상삼매의 원초적인 의식, 즉 한 마음마저도 사라져 마찬가지로 공이라 하지만 깨달음의 현상으로 보면 엄격하게 구분해야 할 것 같다.

바로 진공(眞空)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공이기 때문에 육체적인 기능이나 정신적 기능뿐 아니라 마지막 남은 원초적 의식까지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자리는 사람의 일반적인 육체적 정신적 조건으로는 다가설 수 없는 자리이다.

이 경지를 체험하면 곧 진아의 자리에 들게 된다.

이 때문에 세존은 열반경에서 ‘모든 법이 내가 없다고 하지만 진실로 내가 없는 것도 아니다’고 설하고 있다.

색즉공 차원에서 계속 정진하면 공 가운데에 색이 없는 경지, 즉 무상삼매의 경지에 들게 된다.

그러므로 수상행식이라는 인간 활동의 어떤 형식도 없으며, 인식의 주체(六根)와 그 대상(六境)도 없다.

육근이 없으므로 육식(六識)도 없어서 의식계도 당연히 없다.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진아를 추구하는 욕구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비례하여 세상일에 접촉하려는 욕구가 낮아지게 된다.

세상의 일들에 흥미가 감소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가족과의 관계에서, 또 사회에서, 인간관계에서 파생되는 욕구와 욕망들이, 초월의 경지에 들어서면서

그리고 무상삼매에 가까워지고 또 지나면서 경지에 비례하여 저절로 내려놓아지고 소멸되어 간다.

이 자리에서는 옳고 그름이 없고 예쁘고 미운 것이 없다.

간섭할 일이 없음을 알게 되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쳐다보게 된다.

여기서는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한다는 무명이란 단어는 의미가 없다.

태어나서 늙고 죽는다는 세상의 섭리도 이미 뛰어넘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생(永生)의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미 고집멸도 사제를 넘어 왔으며 더 이상 지혜의 범주를 떠났으므로 얻을 것이 없고 얻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 이르면 마음에 걸릴 일이 없고 꺼릴 일도 없으므로 두려움도 없다.

세상의 가치를 떠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으므로 구경열반에 이르러 위없는 바른 깨달음에 안주하게 된다.

이 구절은 의식이 완전히 소멸한 무상삼매에 이르면 이로해서 터득하게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터득해서 얻었다는 개념이 아니고 물질세계의 근본원리를 알게 되어, 이 세상에서 적응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생을 통해 배우고 경험해서 알게 된 모든 지식이나 습성들과 여기서 파생한 오욕칠정 등의 감정들을 전부 내려놓아 버리는 현상을 설명한 것이다.


twitter facebook
댓글 (0)
주제와 무관한 댓글, 악플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