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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에 흰 눈을 보라"성철스님100주년.불필스님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

금강유기농처사 | 2012.10.05 13:12 | 조회 4163

불필 대덕 큰스님의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를 출가 후 처음으로 이렇게 귀중한 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도 귀한 자필 옥고(玉稿)이기에 더욱 감개무량합니다. 감축드리며 운문사 및 운문사승가대학 스님들과 불자도반 여러분께 각 언론사의 기사를 함께 올립니다.

성철큰스님께서 하신말씀 "어두운 밤에 흰 눈을 보라"와 "영원에서 영원으로" 중에서 고심 끝에 회고록 제목을 "영원에서 영원으로"를 선택을 하셨답니다.

성철큰스님 글은 너무 어려워 불필큰스님 글은 초보 불자도 쉽게 화두, 참선공부를 알 수있게 간곡히 부탁을 했습니다.

55년 이상 참선수행 만 하신 큰스님의 글을 읽어보고 공부의 지표를 삼고 우리도 영원한 행복을 찾아 한번 떠나봅시다.

2012년 9월 18일 출가 하시 후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나오셔서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지금 주석하시는 해인사 금강굴에서 했습니다. 안거철에만 석남사에서 공부를 하십니다.


검색 순으로 기재하였고 먼저 검색된 언론사를 기준으로 적었습니다.

시간 관계로 각 언론사에 사전 동의없이 기사를 옮겨 죄송합니다.

기사의 원문을 존중하여 손질없이 올렸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김영사 관계자 및 박은주 대표님께 감사드립니다.

- 금강 유기농처사 -

영원에서 영원으로 : 불필 스님 회고록ㅣ 불필 스님 지음 ㅣ 김영사

성철스님 탄생 100주년, 딸이며 제자인 불필스님이 처음 밝히는 큰스님 이야기!


처음으로 밝히는 성철스님의 가족사에서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선지식들의 수행까지, 제자들을 뜨겁게 품은 은사 인홍스님부터 온 대중들을 감화시킨 큰스님들의 법거량까지, 책갈피마다 한국불교의 역사가 은은하게 묻어나고 스님들의 아름다운 향기가 깊은 무늬로 아로새겨진다.

그동안 불필스님이 개인적으로 소장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성철스님의 법문과 편지, 사진 자료들이 실렸으며, 과거에 가필된 형태로 발표되었던 성철스님의 친필 법문 노트를 원문 그대로 담겼다.

불교 수행자들에게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증도가>, <신심명>, <토굴가> 등 여러 자료들을 채록해 실어 초심자들이 불교를 공부하는 지침서로서도 손색이 없다.

“만고의 진리를 향해 나 홀로 걸어가노라!”
성철스님 탄생 100주년, 딸이며 제자인 불필스님이 처음 밝히는 큰스님 이야기!


불필스님은 지난 동안거 결제 한 철 동안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이 책을 썼다.

처음에는 산속에서 살아온 선승인 자신이 책을 내는 일이 옳은 일인가 싶어 여러 차례 출간 제안을 거절했지만, 아버지 성철스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큰스님의 법대로 석남사 대중들과 참되게 수행해온 바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달라는 청을 차마 물리치지 못했다.

불필스님은 “이 책으로 큰스님의 가르침을 받아 한 사람이라도 영원한 진리의 삶을 살 수 있다면 감사할 뿐이다”라며 출간의 소회를 밝혔다.

가슴 먹먹해지는 가족 이야기에서 우리 시대 선지식들의 삶까지


이 책에서 성철스님은 가장 가까운 존재이면서도 가장 멀리 있어야 했던 불필스님의 눈을 통해 가장 철저했던 동시에 너무나 자비로웠던 참모습을 드러낸다. 성철스님이 머물던 해인사에 하루는 초로의 보살이 찾아왔다.

사연을 들어보니 베트남전에 참전한 아들이 살아 돌아오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는 것이었다. 성철스님은 일단 보살에게 쌀을 가져다 밥을 지어 부처님 전에 올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일을 마치자 이번에는 한 번에 3천 배 기도를 하고 가라고 명했다.

처음에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하고, 일이 끝나자 신심을 키울 수 있도록 더 큰 일을 시킨 것이었다. 보살은 3천 배를 다 마친 후 기다시피 하며 나왔지만, 이후에는 스스로 백련암에 찾아와 기도하게 되었다.

보살은 남들이 다 하는 능엄주를 하고 싶은데 한글을 읽을 줄 몰라 고민하다가, 시골집에서 동네 아이들을 불러 사탕을 사주면서 능엄주를 읽게 하고 한 줄 한 줄 외웠다고 한다.

성철스님을 한 번도 아버지라 불러보지 못한 불필스님의 고백 또한 절절하다. 불필스님은 성철스님이 열반하신 후에도 영결식과 다비식에 나가지 못했다. 신문에서 불필스님의 이름에 담긴 뜻, 즉 ‘필요 없다〔不必〕’는 의미를 석가모니의 아들 라훌라(장애)와 비슷한 뜻으로 해석하여 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불필스님은 다비식 날 늦은 오후 금강굴 위 다비장에서 사그라지는 불꽃을 바라보며 절을 올렸다. 과거, 현재, 미래 삼세를 다 합해서 다시 만나 뵐 것을 약속하는 아홉 번의 절이었다. 불필스님은 “생사의 바다에서 마음의 눈을 바로 떠서, 영원한 대자유인으로서 성철스님을 다시 만날 것”이라고 다짐한다.

이 책에는 인홍스님, 법전스님, 향곡스님, 묘엄스님, 법정스님 등 대가들의 성자 같은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한 예로 11대 조계종 종정을 지내신 법전스님은 해인사에 있을 때 선방에 앉으면 미동도 하지 않아 ‘절구통 수좌’로 불렸다.

일주일 동안 잠을 자지 않는 해인사 전통의 용맹정진 때도 유일하게 졸지 않은 사람이 법전스님이었다. 졸지 않는 비결을 묻는 후학들에게 법전스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화두 떨어지면 죽는다고 생각하면, 졸 수 있는가?” 이처럼 철저한 정신과 수행이 법전스님을 우리 시대의 대승(大僧)으로 만들었다.

성철스님과 불필스님의 가슴 찡한 가족사는 이 책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귀중한 이야기이다. 불필스님이 출가를 결심했을 때 어머니는 딸의 출가를 막기 위해 지아비 성철스님을 찾아갔다.

철조망을 두른 채 정진하는 성철스님을 종일 기다린 어머니는 스님이 시자실에 온 틈을 타 문을 부수고 들이닥친다.

성철스님은 시자들에게 큰 소리로 당장 쫓아내라며 펄펄 뛰었고, 어머니는 지아비 성철스님에게 “스님, 내가 할 말이 있어 왔소!”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어머니는 시자들에게 끌려나오고 말았고, 결국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남편과 딸이 절로 떠나보낸 어머니는 그 불연(佛緣)을 어쩔 수 없었는지 쉰일곱의 나이에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마음속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지금 우리 사회는 물질적으로는 풍요를 구가하는 듯 보이지만 정신적으로는 깊은 병이 들어 있다. 자신의 마음속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비극이다. 불필스님은 책의 말미에 “자기를 바로 봅시다”라는 성철스님의 법어를 인용하면서 독자들에게 진정한 메시지를 전한다.

사람은 본래 구원되어 있는 존재이며 이미 부처이다. 그러나 우리는 순금 같은 존재인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여 잡철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만약 욕심을 버리고 힘을 다하여 남을 도울 수 있다면, 자신을 바로 보고 깨달은 부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올해는 우리 곁에 왔던 부처 성철스님이 탄생하신 지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딸이며 제자인 불필스님의 떨리는 듯 생생한 육성을 들으며 큰스님의 삶과 유산에 대해 재음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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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필스님은 성철스님 탄생 100주년을 맞아 18일 발간한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에서 가슴 절절한 가족사와 개인적으로 소장해왔던 성철스님의 법문과 편지, 사진, 친필 법문 노트 등을 공개했다. 사진은 성철스님이 참선수행의 어려움을 강조하면서 불필스님에게 써준 친필 편지.(합천=연합뉴스)

불필스님은 성철스님 탄생 100주년을 맞아 18일 발간한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에서 가슴 절절한 가족사와 개인적으로 소장해왔던 성철스님의 법문과 편지, 사진, 친필 법문 노트 등을 공개했다. 사진은 불필스님(왼쪽)과 현각스님. 성철스님(가운데)과 함께 백련암에서 찍은 사진. (합천=연합뉴스)

불필스님은 성철스님 탄생 100주년을 맞아 18일 발간한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에서 가슴 절절한 가족사와 개인적으로 소장해왔던 성철스님의 법문과 편지, 사진, 친필 법문 노트 등을 공개했다. (합천=연합뉴스)

불필스님이 18일 오전 경남 합천군 해인사에서 간담회를 열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불필스님은 자신의 아버지이자 스승인 성철스님 탄생 100주년을 맞아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를 냈다. (합천=연합뉴스)

불필스님이 18일 오전 경남 합천군 해인사에서 간담회를 열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불필스님은 자신의 아버지이자 스승인 성철스님 탄생 100주년을 맞아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를 냈다. (합천=연합뉴스)

불필스님은 성철스님 탄생 100주년을 맞아 18일 발간한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에서 가슴 절절한 가족사와 개인적으로 소장해왔던 성철스님의 법문과 편지, 사진, 친필 법문 노트 등을 공개했다. (합천=연합뉴스)

"영원한 행복 찾아 아버지 성철스님의 길 따랐죠" [연합뉴스] 2012.08.18

「마음속으로 '저 분인가?'하는 순간, 그분이 소리를 크게 질렀다. "가라, 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삼촌의 손을 꼭 잡고 돌아서 버렸다. "집에 가자, 삼촌!"」 (29쪽)

지난 1993년 입적한 성철스님의 유일한 혈육인 불필스님이 처음 마주한 '아버지'의 모습은 매정함 그 자체였다.

불필스님은 성철스님 탄생 100주년을 맞아 18일 발간한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김영사. 396쪽. 1만4천원)'에서 가슴 절절한 가족사와 개인적으로 소장해왔던 성철스님의 법문과 편지, 사진, 친필 법문 노트 등을 공개했다.

속세의 나이로 올해 75세인 불필스님은 성철스님의 친딸이자 제자다. 불교계에서는 유명하지만 세상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10대 후반에 출가한 불필스님은 1961년 3월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정식 비구니계를 받은 뒤 경북 문경 대승사 묘적암, 경남 합천 해인사 국일암, 지리산 도솔암 등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행했다. 현재 해인사 금강굴에 머물고 있다.

불필스님은 성철스님과 처음 대면했던 초등학교 6학년 당시를 "그때 아버지가 다정하게 대했더라면 아버지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했을 텐데 매정하게 대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바다 속에 묻고 돌아설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회고한다.

1954년 성철스님과의 두 번째 만남은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불필스님이 출가를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됐다.

"행복은 인격에 있지 물질에 있는기 아이야. (중략) 그라니 부처님처럼 도를 깨친 사람은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대자유인이고, 이 세상의 오욕락을 누리고 사는 것은 일시적 행복인기라."
(46쪽)

불필스님은 이날 오후 해인사 금강굴 문수원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성철스님이) '영원한 행복과 일시적 행복이 있다'고 하실 때 나는 벌써 나의 생을 결정내버리고 말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항상 행복만 추구했지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어요. 영원한 행복이라는 말에 바보가 아닌 이상 영원한 행복의 길로 가겠다고 결심했죠."

출가를 꿈꿨으나 일찍 세상을 떠난 언니, 출가한 아들을 보러 금강산까지 찾아갔던 할머니, 남편에 이어 딸까지 출가한 뒤 50대에 세속의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한 어머니까지 "전부 전생의 스님들이 온 것 같은" 가족사도 구구절절 풀어놨다.

성철스님을 단 한 번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오직 스승으로 섬겨 왔던 불필스님은 그동안 외부 노출을 꺼리며 수행에만 정진했다. 간담회도 이번이 처음이다.

회고록을 내는 것도 꺼렸으나 "큰스님의 법대로 석남사 대중과 참되게 정진 수행해 온 바를 다른 사람들과 나눠 달라"는 거듭된 출판사의 청을 물리치지 못했다.

책에는 처음 발심(發心)해 출가한 수행자를 위해 성철스님이 직접 쓴 법문 노트 '백비(百非)'의 내용도 일부 실렸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과 함께 주신 책이에요.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다는 뜻에서 백비라고 이름 붙이고 항상 수행할 때마다 가지고 다녔죠."

성철스님은 법문노트에 수도팔계(修道八戒·수행자가 지켜야 할 8가지 원칙) 등의 법문을 담았다고 한다. 영원한 자유를 위해 일시 소소한 영화는 완전히 버려야 한다는 희생과 절속, 고독, 천대, 하심, 전념, 노력, 고행 등이 그것이다.

책을 통해 처음 공개되는 법문도 있다.

"나를 위해 남을 해침은 불행의 근본이요 참다운 행복은 오직 나를 버리고 남을 돕는 데서 옴을 깨달았사오니 항상 내 몸을 돌보지 않고 오직 남을 위해 일하고 사는 사람이 돼 영원한 행복을 받는 길로 이끌어주시옵소서."
(232쪽)

"못난 중으로 숨어서 공부만 하겠다는 약속에 상반되는 일"인 금강굴을 짓고 난 뒤에는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성철스님에게 호된 꾸지람을 듣는 편지도 받았다.

"금생에 마음을 밝히지 못하면/ 한 방울 물도 소화하기 어려우니라.// 공부에 손해되는 일은 일체하지 않아야 한다./ 만사가 인연 따라 되는 것이니/ 모든 일은 인연에 맡겨두고/ 쓸데없는 신경은 필요없다."
(328쪽)

불필스님은 책 말미에 열반 전에 미처 세우지 못한 시비(詩碑)를 세우는 마음으로 "자기를 바로 봅시다"라는 성철스님의 법어를 인용했다.

"현대는 물질 만능에 휘말려 자기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큰 바다와 같고 물질은 거품과 같습니다. 바다를 봐야지 거품은 따라가지 않아야 합니다."
(395쪽)

불필스님은 세간에 '필요없는 딸'이라는 뜻으로 알려진 법명 '불필(不必)'에 대해서는 "(성철스님이) 세상에 아주 쓸모없는 사람이 돼야 비로소 도를 이룰 수 있다는 의미로 지어줬을 것"이라며 "이름에 포함된 더 깊은 선지(禪旨)는 공부를 다해 마쳐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쓴 글입니다. 이 모든 것을 인연이라 생각하고 이 책으로 큰스님의 가르침을 받아 한 사람이라도 영원한 진리의 삶을 살 수 있다면 감사할 뿐입니다."


“성철스님, 아버지라 불러보지도 생각한 적도 없다” [불교신문] 2012.09.18

[인터뷰]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 출간한 불필스님

불필스님이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를 출간하며 기자회견을 통해 아버지 성철큰스님으로부터 가르침과 출가경위들을 상세히 밝혔다.

불필스님은 해인사 금강굴 문수암에서 언론사 기자들과 9월18일 만나 책이름이 근원이 된 사연으로 “묘엄스님 부음을 접했을 때 봉녕사에 올라가 영구가 놓인 법당에서 영정에 차 한잔을 올리고 심검당으로 돌아 오는데,

열세살 때 큰스님(아버지 성철스님)을 처음 만났던 일부터 내가 살아온 날들이 스쳐지나갔고 그 때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이 삶에서 부끄러움 없이 공부에 충실했는가’는 반문이 들었다”고 말했다.

스님은 천제굴에서 큰스님을 처음뵈었을 때 ‘영원한 행복과 일시적 행복’에 대한 말씀을 듣고 “부처님처럼 도를 깨쳐서 대자유인이 돼 세상의 오욕과 일시적 행복을 넘어서라는 화두를 갖고 깨치면 대자유인이 되기 위해 가르침을 받고 출가의 길로 일관했다”고 말했다.

사숙이며 도반인 어머니 일휴스님 입적 때는 눈물을 안보이고 묘엄스님 때 눈물을 보였다고 책에서 적은 내용에 대해 “아버지와 어머니는 스님으로 가르침을 주신 분이고,

묘엄스님은 수행에서 도반처럼 가까운 사이였다”고 말하고, 책에서 많이 인용되고 있는 성철스님이 출가전 주신 법문집인 ‘백비’에 대해 “부분적 인용이고 더 많고 큰 가르침이 담겨있어 늘 수지했었다”고 말했다.

스님은 이어 “기자간담회는 생전 처음”이라며 회고록을 낸 이유에 대해 “김영사와의 인연으로 몇차례 요청이 왔으나 산승으로 세 번 거절했었다.

“숨어사는 중근기 도인의 인연으로 살면서 공직이나 세상에 나타나지 안으려 했기에 언론 회견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스님의 주석처인 금강굴도 ‘잠깐 쉬어가는’의 뜻이라 설명했다.

스님은 이어 “큰스님이 ‘한길로만 가면 된다. 결국은 승부난다’고 말씀했다”면서 법명 불필과 관련 “큰스님이 ‘서서히 공부해라’고 말씀했고, 도반이자 친구인 백졸스님 법명으로 지어주시면서 불필에 대해 ‘하필을 알면 불필의 뜻을 안다’면서 법명을 주신 것”이라며 “‘공부를 다 마치면 이름 뜻을 알거다’고도 말씀했다”고 밝혔다.

스님은 이어 “한 번도 아버지라고 불러 본 적이 없고 처음 만나 ‘누더기의 큰눈 스님’이라고 생각한 이후 아버지라는 생각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스님은 공식 기자회견 후 기자와의 차담을 별도 방에서 나누며 1만배 정진과 관련된 질의에, "백졸스님과 부산 옥천사에서 같이 했다"면서 "부처님과 약속이며 나와의 약속이라는 생각이 중간중간의 고비를 넘게 했고 큰스님 가르침이 정립되게 됐었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도 후학들에게 3000배 수행을 가르친다"면서 "22일간 3000배를 하고 내면의 세계를 다시보는 극적인 힘을 봤었다"고 말했다.

이날 출간된 <영원에서 영원으로>는 김영사에서 출판했으며, 스님이 지난 동안거 겨울 3개월간 집필한 내용으로 1장 ‘인연’부터 ‘출가’ ‘친필 법문노트’ ‘행자시절’ ‘석남사’ ‘수행’ ‘해인사’ ‘영원한 시간들’ 등 총 8장의 395쪽으로 구성됐다.

"노력 없이 아무 성공도 없데이" [불교닷컴] 2012.09.14

성철 스님 딸 '불필 스님'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 출간

성철 스님 탄신100주년을 맞아 스님의 친딸 불필 스님의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김영사)가 오는 17일 출간될 예정이다.

불필 스님은 이 책에서 아버지 성철 스님의 알려지지 않은 법문을 비롯해 인홍ㆍ법전 스님 등 선지식과의 인연, 자신의 수행 과정 등을 400여 쪽에 걸쳐 풀었다. 올해 세납 75세인 스님은 건강이 좋지 않은 가운데 구술로 회고록을 2년 여에 걸쳐 완성한 것으로 전해졌다.

불필 스님은 “속이지 말고 공부하라”고 평생을 외쳤던 가야산 호랑이 성철 스님(1912~1993)의 친딸이다. 성철 스님이 출가자의 길에 들어선 후 스님의 세속 시절 부인은 입산해 ‘일휴’ 스님이 됐고, 딸 수경은 출가해 ‘불필’ 스님이 됐다.

불필 스님은 현재 합천 해인사 산내암자인 금강굴에 주석하고 있다. 스님은 2009년 3월 이명박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이 평소 성철 스님을 존경해 친딸인 불필 스님을 김 여사가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초청해 점심을 함께 하는 자리였다.

불필 스님의 회고에 따르면, 아버지 성철 스님은 수도승으로서의 노력을 늘 강조했다. 딸에게도 그 가르침은 다르지 않았다. 부녀가 각기 출가해 세속의 인연은 떠났지만 딸 불필 스님에게 아버지 성철 스님의 가르침은 늘 가슴 속에 남아있었다.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되는 기라. 노력 없이는 아무 성공도 없데이.”

성철 스님이 불필 스님에게 늘 강조하던 말이었다.

불필 스님은 ‘비구니의 대모’ 인홍 스님을 은사로 태백산 홍제암에서 출가해 1961년 3월 통도사에서 비구니계를 받았다. 이후 불필 스님은 성철 스님의 상좌 백졸 스님과 본격적인 운수납자의 길을 나섰다.

문경 대승사 묘적암, 합천 해인사 국일암, 지리산 도솔암 등 제방을 두루 다녔던 스님은 성철 스님의 지시에 따라 1969년 은사 인홍 스님이 있는 석남사로 돌아왔다. 그 후 불필 스님은 석남산 심검당에서 3년 결사를 했다.

매일 새벽 300배로 정진을 시작했던 결사에는 인홍ㆍ장일ㆍ성우ㆍ혜관 등 큰스님들과 법희ㆍ법용ㆍ백졸ㆍ혜주 등 젊은 비구니스님들이 참여했다.

300배를 하는데 노스님들이 젊은 스님들보다 빨랐다. 세대 간의 차이랄까. 노스님들은 젊은 스님들에게 “맞춰서 절을 빨리하라”고 채근했다. 불필ㆍ혜주ㆍ법용 스님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하루는 짜고서 절을 더 느리게 했다. 노스님들이 가만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은사였던 인홍 스님이 세 스님을 불렀다. 그리고는 옥류동으로 산책을 가자고 했다. 인홍 스님은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앞장섰다. 그때였다. 은홍 스님은 갑자기 돌아서면서 지팡이로 사정없이 스님들을 내리쳤다.
성철 스님의 매질을 피해 도망을 다니는데 이골이 났던 불필 스님은 재빨리 지팡이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스님들은 대나무 지팡이를 맞았다.

3년 결사가 끝나갈 무렵, 100일간 용맹정진을 했다.

불필 스님은 “밤에 졸리면 밖에 나가 산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전등도 없던 시절이라 사방이 캄캄한데 산길을 혼자 걷다보면 바로 옆에 큰 짐승이 지나가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때도 있었다”고 회고한다.

칠흑 같은 암흑 속 머리칼이 쭈뼛해질 정도로 무서운 밤길이었지만 졸음보다 무섭지는 않았다.

불필 스님은 큰 짐승이 곁을 지나며 무서움이 들 때면 “내가 너를 해치지 않았는데, 네가 나를 해칠 까닭이 뭐가 있고, 또 무엇이 그리 무서울 것인가”하는 마음으로 견뎠다.

불필 스님은 1972년 가을 3년 결사를 무사히 회향했다. 석남사 결사의 리더였던 인홍 스님은 고희(古稀)를 맞아 주지 소임을 법희 스님에게 넘겼다. 그리고는 본인은 다시 정처 없는 운수납자의 길을 가겠다며 칠불암으로 떠났다.

은사스님이 떠난 절이지만 불필 스님은 석남사에 남았다. 아버지 성철 스님의 가르침대로 공부하고 또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석남사에 남은 불필 스님은 청조 스님 등 7명의 스님들과 함께 심검당에서 100일 장좌불와(長坐不臥)를 시작했다.

불필 스님은 당시 심검당에 2그루의 보리수나무를 심었다. 40년이 지난 지금은 한 그루가 크게 자라 봄이면 꽃향기를 가득 내뿜고 여름이면 무성한 나뭇가지로 더위를 식혀주고 있다. 그 나무는 가을이면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는 석남사 대중의 손에 꿰여 아름다운 보리수 염주가 된다.

불필 스님은 석남사 보리수를 볼 때 마다 당시 함께 정진하던 스님들이 그립다고 말한다. 아버지였던 가야산 호랑이의 가르침도 함께.

헤럴드경제

성철스님 딸 불필스님 “단 한번도 아버지라 불러보지 못했다” [헤럴드경제] 2012.09.18

“묘관음사 입구에 도착하니 어느덧 해질 무렵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산기슭을 따라 한참 올라갔더니 우둘두둘 무섭게 생긴 스님이 보였다. 상상속에 그려왔던 아버지의 모습은 아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의 도반인 향곡스님이었다.…아버지 큰스님은 아마 우리가 올 것을 알고 어디론가 피해 계셨던 것 같다. 조금있다가 향곡스님과 함께 다 떨어진 누더기를 걸친, 눈이 부리부리한 스님 한 분이 나타났다. 마음속으로 ‘저 분인가?’하는 순간, 그 분이 소리를 크게 질렀다.

“가라, 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삼촌의 손을 꼭 잡고 돌아서버렸다.
“집에 가자, 삼촌!”

성철스님의 유일한 혈육 불필스님은 18일 펴낸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김영사)에서 단 한번도 성철스님을 아버지라 불러보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성철스님은 그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이면서도 가장 멀리 있는 존재였다.

책에는 처음으로 밝히는 성철스님의 가족사가 들어있다.

지난 동안거 결제 한철 동안 손가락에 굳은 살이 박이도록 이 책을 썼다는 스님은 처음에는 산속에서 살아온 선승인 자신이 책을 내는 일이 옳은 일인가 싶어 출판 제안을 여러차례 거절했다고 밝혔다.

다만 “이 책으로 큰스님의 가르침을 받아 한 사람이라도 영원한 진리의 삶을 살 수 있다면 감사할 뿐이다“며 출간의 소회를 밝혔다.

불필스님은 출가한 뒤 어머니가 ?겨날 것을 뻔히 알면서도 큰스님을 찾아와 매달린 사연도 담았다.

“그렇게 도가 좋으면 혼자 가면 되지 왜 하나 밖에 없는 딸까지 데려가느냐? 딸만이라도 돌려주면 이 세상 누구 못지않게 훌륭한 사람을 만들어볼 것이요” 담판을 짓고 싶어서였다는 것. 그런데 말한 마디 꺼내보지 못하고 어머니는 ?겨났다.

불필스님은 성철스님의 법문의 쉽고 명료함은 놀랍다고 말한다. 1950년대, 큰 스님의 나이 40대 중반에 작성한 것인데 내용이 일목요연하고 군더더기 없어 귀에 쏙쏙 들어온다는 것이다.

불필스님은 1937년 지리산 자락 묵곡리에서 태어나 천진무구한 유년시절을 보내다 갑작스럽게 언니의 죽음을 맞았다. 이후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생각에 빠져 있던 중 아버지 성철 스님으로부터 영원한 행복의 길에 대한 말씀을 듣고 출가를 결심한다.

1956년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성철스님이 직접 쓰신 법문 노트를 받아 수행의 지침서로 삼았다. 출가 이후엔 자유로운 운수남자로 해인사 청량사, 태백산 홍제사, 문경 대승사 윤필암 등 제방선원을 다니며 공부했으며, 1993년 성철 스님이 열반하신 후 지금까지 석남사 심검당에서 수행정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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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낸 성철 스님 딸 불필 스님 "생전에 한번도 아버지라 못불렀죠" [매일경제] 2012.09.18

"그래, 니는 무엇을 위해 사노?"

"행복을 위해 삽니다."

"그래? 행복에는 영원한 행복과 일시적인 행복이 있는기라. 그라믄 니는 어떤 행복을 위해 살려고 하노?"

"어떤 것이 영원한 행복이고, 어떤 것이 일시적 행복입니까?"

"행복은 인격에 있지 물질에 있는기 아이야. 부유하더라도 인격이 부족하면 불행하고 궁핍하더라도 인격이 훌륭하면 행복한기야. 부처님처럼 도를 깨친 사람은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대자유인이고, 이 세상의 오욕락을 누리고 사는 것은 일시적 행복인기라."

6ㆍ25 전쟁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54년 여름. 경남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서 수행에 정진하던 성철 스님(1912~1993)에게 열여덟 살 딸이 찾아온다.

결혼하고 20대 중반의 나이에 출가한 성철 스님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 첫째딸은 열 넷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둘째딸이자 현재 유일한 혈육이 바로 불필(不必) 스님(75)이다.

진주사범학교 2학년이던 그는 아버지를 만난 뒤 스무 살의 나이에 출가한다. 유복한 선비였던 할아버지는 "우리 집안이 망했구나" 탄식했고, 남편에 이어 딸까지 세속을 등지자 어머니는 "독사보다 더 지독하다"고 말했다.

최근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김영사)를 펴낸 불필 스님은 18일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기자들과 처음으로 만나 "안정사에서 두 번째로 큰스님을 뵌 이후부터는 (성철 스님은) 아버지가 아닌 큰스승으로 바뀌었다"고 고백했다. 자그마한 체구였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다.

회고록은 올해 성철 스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주변의 권유로 펴낸 것이다.

그에게 성철 스님은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멀리 있어야 하는 존재였다. "아버지를 한 번도 아버지라 부른 적이 없었어요. 언니가 있을 때는 아버지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몰랐지요. 아홉 살 때 언니가 죽고 나니, 왜 나는 아버지가 없는가 스스로 생각하게 됐죠."

언니의 죽음으로 그는 '사람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고민했다. 그는 아버지가 스님이라는 자체도 너무 싫었다고 했다. "스님이 도대체 뭔가. 동화 속에 나오는 거지란 말인가. 어떤 이유 때문에 가족을 등지고 산속에서 사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지요.

"아직도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으로 아버지를 만났던 모습이 뇌리에 생생하다. "다 떨어진 누더기를 걸치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눈에 빛이 나고 부리부리했지요."

그러나 성철 스님은 매정했다. 아버지를 처음 찾아온 딸에게 그는 "가라, 가"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자리를 뜨려던 그를 붙잡은 이는 성철의 벗인 향곡 스님이었다.

그는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아버지'라는 말을 책에서 너무 자주 쓴 것 같아 쑥스럽다"고 했다.

석남사에서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성철 스님이 그에게 물었다.

"도인 중에는 미친 도인, 숨어 사는 도인, 중생을 제도하는 도인이 있다. 또 '내 떡 사소' 하는 도인이 있는기라. 니는 어떤 도인이 되고 싶노?" 이 말에 그는 숨어 사는 도인이라고 말했다.

성철 스님은 "숨어 사는 도인은 언젠가는 남의 눈에 띄니 중근기이고, '내 떡 사소' 하는 도인은 하근기인기라. 제일 상근기(上根機ㆍ높은 수준)는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는 사람인기라."

대중의 눈에서 '숨어 살던' 불필 스님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고 했다. 어머니 역시 57세 나이로 출가했다.

"두 분 다 멋지게 살다가 멋지게 돌아가셨는데 눈물이 뭐가 필요하겠느냐고 생각했죠. 그렇지만 친구인 묘엄 스님(청담 스님 딸)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군요."

출가한 뒤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는지 궁금했다.

"절에 와 보니 항상 '내일이 없다'는 사실이 뼈에 사무쳐요. 속가에서 보낸 시간이 아까워 더 일찍 출가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지요." 그는 아직도 아버지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더 공부하고 더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살기 팍팍한 세속을 향해 한 말씀 청하자 스님은 성철 스님이 종정에 추대된 이듬해인 1982년 내린 첫 한글 법어 '자기를 바로 봅시다'를 언급했다. "세상 사람들이 이 법어를 다 봤으면 좋겠어요. 봐도 봐도 진금이지요. 자성을 바로 보는 것 말고 더 무엇이 있겠습니까."

한국경제

성철 스님 딸 불필 스님 "큰스님을 한 번도 아버지라 못 불렀죠" [한국경제] 2012.08.18

회고록 '영원에서…' 출간한 성철 스님 딸 불필 스님
"너는 왜 사느냐고 묻기에 행복 위해 산다고 했더니 道 깨치면 大자유인이지…"


“큰스님은 아버지가 아니라 큰 스승이었습니다. 열일곱 살에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서 두 번째로 뵌 순간부터 그랬죠. 책에서는 아버지라는 표현을 여러 군데 썼지만 단 한 번도 아버지라 불러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스승으로서 제자가 공부할 수 있는 길은 활짝 열어주셨죠.”

조계종 전 종정 성철 스님(1912~1993)의 친딸이자 제자인 불필 스님(75)이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김영사)를 냈다. 불필 스님은 책 출간을 기념해 18일 오후 경남 합천 해인사 산내암자인 금강굴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출간 동기와 책에 담긴 내용 등을 설명했다.

1937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난 불필 스님은 1957년 경남 울주 석남사에서 인홍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전국 각지의 선방에서 참선수행으로 평생을 보냈다.

성철 스님이 그랬듯, 불필 스님도 “평생 숨어사는 도인이 되겠다”며 세속과는 거리를 두고 살아온 터라 이날 기자들과의 만남은 이례적인 자리였다. 회고록 출간도 세 번을 거절한 끝에 올해가 성철 스님 탄생 100주년이어서 집필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열세 살 때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던 삼촌과 함께 부산 기장군의 묘관음사로 큰스님을 처음 찾아갔는데 ‘가라, 가!’ 하고 소리를 지르시는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도 ‘삼촌, 집에 가자’며 돌아서버렸죠. 그때 아버지에 대한 환상과 그리움, 혈육으로서의 인연을 정리했어요. 지나고 보니 참 다행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때 다정하게 대했더라면 아버지에 대한 집착을 놓치 못했을 텐데 매정하게 대했기 때문에 모든 걸 바다에 묻고 돌아설 수 있었으니까요.”

책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가족사와 성철 스님과의 여러 일화도 담았다. 다섯 살 많았던 언니의 갑작스런 죽음과 이로 인해 생긴 생사의 의문, 생명의 덧없음을 뼈저리게 느꼈던 6·25 전쟁 체험, 아버지와의 만남과 출가 및 수행 과정, 어머니(일휴 스님)의 출가에 이르기까지 팔순을 바라보는 한 평생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전해준다.

“진주사범학교 2학년 때 천제굴에서 두 번째로 큰스님을 뵈었을 때 이렇게 물으셨어요. 너는 왜 사느냐고요. ‘행복을 위해 산다’고 답하자 ‘행복에는 일시적인 행복과 영원한 행복이 있다’며 오욕락(식욕·색욕·재물욕·명예욕·권력욕)을 누리는 건 일시적인 행복이고 부처님처럼 수행해서 도를 깨치면 영원한 대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죠.”

이날 만남은 불필 스님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 자리에서 성철 스님으로부터 화두를 받은 딸은 학교 공부보다 화두 드는 일에 매달렸다.

그러다 “부처님은 6년 만에 도를 깨쳤지만 나는 3년 만에 깨치고 돌아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그러나 깨달음의 길은 쉽지 않았고, 단거리 경주로 끝내려던 계획은 ‘장거리’ 경주로 바뀌었다.

회고록에서 특히 주목되는 건 성철 스님이 불필 스님에게 건네준 ‘법문노트’다. 성철 스님이 친필로 작성한 법문노트에는 수행자가 지켜야 할 ‘수도 8계’와 ‘12두타행(고행)’ 등 실질적인 지침이 담겨 있다.

해마다 빠짐없이 석남사 심검당에서 안거를 보내는 불필 스님은 지금도 스스로 되묻는다.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이 삶에서 부끄럼 없이 공부에 충실했는가.” 그러면서 책의 말미에 성철 스님을 위해 ‘모양 없는’ 시비(詩碑)를 세웠다. 그 시비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성철 스님이 1982년 부처님 오신 날에 내놨던 한글 법어다.



경향신문

“아버지 성철은 대자유인이 되는 길 열어준 스승” [경향신문] 2012.09.18

ㆍ성철 스님 탄생 100년 맞아 회고록 낸 불필 스님


성철 스님의 유일한 혈육인 불필 스님이 가족사와 수행자로서의 삶을 처음으로 세상에 밝혔다.

불필 스님은 18일 출간된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김영사)에서 “성철이라는 이름은 아버지가 아닌 영원한 대자유인이 되는 수승한 길을 열어준 온전한 스승”이라며 성철 스님을 기억했다.

1937년 경남 산청의 지리산 자락에서 태어난 불필 스님은 성철 스님이 출가 전 낳은 두 딸 중 한 명이다. 성철 스님은 출가 후 가족과의 인연을 완전히 단절했기에 불필 스님은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 채 자랐다.

언니가 중학교에 입학하기 직전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불필 스님은 큰 실의에 빠졌고, “사람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질문을 자주 떠올렸다.

불필 스님이 처음으로 아버지를 찾아간 것은 13세 때의 일이다. 그는 가족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그리움을 함께 갖고 성철 스님이 수행 중인 부산 묘관음사로 떠났다. 그러나 “다 떨어진 누더기를 걸친, 눈이 부리부리한 스님”은 딸을 보자마자 “가라, 가!”하고 소리를 질렀다. 속이 상한 불필 스님은 그 길로 돌아섰다.

그러나 18세에 두번째로 만난 성철 스님이 “행복에는 영원한 행복과 일시적인 행복이 있다”고 말했을 때, 불필 스님은 “벌써 나의 생을 결정내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1956년 진주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발령을 기다리고 있던 불필 스님은 출가를 만류하는 가족 앞에 “누구든 제 죽음을 대신해 줄 수 있다면 절에 가지 않겠다”고 말한 뒤 이듬해 인홍 스님을 은사로 석남사에 들어갔다.

성철 스님은 호된 스승이었다. 참선 수행의 어려움을 강조하는 친필 글씨를 써주는 자상함을 보이는가 하면, 앞뒤 설명 없이 들고 있던 우산으로 내려치기도 했다.

불필 스님은 “세상 천지에 자신의 일을 해결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고, 그러한 절박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때 인생이 자기 것이 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책은 성철 스님이 내린 ‘불필’이라는 법명의 의미도 풀었다. 세간에서는 ‘불필’을 ‘필요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 석가모니가 아들 이름을 라훌라(장애)라고 지은 데 비견하곤 한다.

하지만 불필 스님은 “세상에 아주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도를 이룰 수 있다는 의미에서 주신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불필 스님은 자신이 “큰스님(성철)에게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멀리 있어야 하는 존재였다”고 전한다.

그래서 성철 스님의 영결식, 다비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불필 스님은 그동안 수차례의 출간 제의를 거절했으나 올해 성철 스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그의 가르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자는 청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아울러 “이 책으로 큰스님의 가르침을 받아 한 사람이라도 영원한 진리의 삶을 살 수 있다면 감사할 뿐”이라고 밝혔다.



정정당당한 신문 한국일보

"이름 한번 못 불러본 아버지… 다비식 날 먼발치서 절만 올려" [한국일보] 2012.09.18

■ 성철 스님 딸 불필 스님 회고록 '영원에서…' 출간


"아버지가 아닌 스승이고 가깝지만 가장 먼 존재… 다음 생에 곁에서 모실 것" 절절한 그리움 표출도


"태어나 한 번도 '아버지'라는 이름을 불러보지 못했어요. 큰스님의 영결식과 연화대 다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다비식 날 늦은 오후에야 금강굴 위 산등성이에서 사그라지는 다비장의 불꽃을 바라보며 절을 올릴 수 있었지요."

'가야산 호랑이'로 불리는 성철 큰스님의 친딸이자 제자 불필(不必ㆍ75) 스님이 18일 경남 합천 해인사 금강굴 선방(禪房) 문수원에서 기자들과 처음으로 만났다. 성철 스님 탄신 100주년을 맞아 낸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김영사 발행)를 소개하는 자리였다.

18세 여름 경남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서 그리운 아버지와 두 번째로 만난 자리에서 출가를 결심한 스님은 "(성철)큰스님께서 '행복에는 영원한 행복과 일시적 행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순간 영원한 대자유인이 되기 위해 출가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성철 스님은 아버지가 아니라 스승이고,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멀리 있어야 하는 존재였다고 스님은 회고했다. 불필 스님의 출가에는 1950년 9살 때 다섯 살 위 언니가 숨지고, 한국전쟁으로 무고한 사람이 숱하게 죽는 걸 본 것도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구 파계사 성전암에서 수행하던 아버지를 찾아가 발심(發心)을 알렸다.

불필 스님은 "큰스님께서 직접 쓰신 수행교과서 <납자십게>(衲子十偈ㆍ스님에게 주는 10가지 당부)와 <수도팔계>(修道八戒ㆍ수도하는 데 경계해야 할 8가지)를 저에게 주셨는데 얼마나 신심이 났는지 '병이 나도 병원에 가지 말고 법당에 가서 부처님께 절하고 감로수를 얻어먹자'고 생각할 정도였다"고 돌이켰다.

하지만 그는 득도에 욕심이 나 해인사 말사인 청량사에서 평생의 도반인 백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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