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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다'라는 말의 언저리

가람지기 | 2006.07.12 16:28 | 조회 4070



'롭다' 라는 말의 언저리들

[롭다]
주체가 텅 비어있는 마음을 응시하는 중일 때 사람들은 '외롭다'라고 말한다.
텅 비어 있는 마음을 응시한다는 의미에서 이 말은 나의 어떤 정황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외롭다라는 말은 형용사가 아니다. 활달히 움직이고 있는 동작 동사이다.
텅 비어버린 마음의 상태를 못 견디겠을 때에 사람들은 외롭다라는 낱말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것을 발화한다. 이미 외로움을 어찌하지 못해 움직여대는 어떤 에너지가 담겨져 있다.
그 에너지가 외로운 상태를 동작동사로 바꿔 놓는다.


[쓸하다]
'외롭다'라는 말에 비하면, '쓸쓸함'은 마음의 주체보다는 마음 밖의 정경에 더 치우쳐 있다.
정확하게는, 마음과 마음 밖의 정경의 관계에 연루되어 있다.
마음을 둘러싼 정경을 둘러보고는(응시하기보다는) 그 낮은 온도에 영향을 받아서 마음의 온도가 내려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외로움은 갑자기 찾아오기 어렵지만, 쓸쓸함은 갑자기, 불현듯 찾아오기도 한다.


[태]
'외로움'과 '쓸쓸함'의 끝자락에는 능동적인 움직임이 이어진다.
외로움이 고독이라면, 고독에게 파먹히고 있으면서도 파먹히는 제 살을 대안없이,
게으르게 바라볼 때가 '권태'의 상태이다.
아무 것도 진단하지 않고 아무 것도 하려고 하지 않는 상태라는 점 때문에
권태는 늘 만만한 상태에서 지속되고 진행되며 발전된다.
권태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천장을 응시하며 벽지의 연속된 무늬를 하나하나 세는 일이다.
외로움은 괴롭지만, 권태로움은 괴롭지가 않다.
괴로운 상황이 괴롭지 않게 여겨진다는 그 점 때문에 조금 더 위험스럽다.
또한 마음의 병든 상태에 가깝다.
권태로부터 벗어나려면, 그 마음자리를 외로움의 상태로 다시 명명할 줄 알아야 한다.
외로움은 약 없이도 회복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회복되지 않더라도 약 없이도 살아지지만),
권태는 최소한 '외로움'이란 외투로 갈아입어야 마음을 회복할 기미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심하다]
이것은 가장 순진한 상태의 외로움이다.
어린 아이들은 외롭고 쓸쓸하고 권태롭고 허전하고 공허한 상태를 '심심하다'라는 말로 뭉뚱그린다.
만약, 어린 아이가 '외롭다'라는 말을 잘 깨닫고 발화한다면, 이미 어린 아이가 아니다.
입이 심심할 때에 무언가 먹을 거리를 찾아내듯이, 마음이 심심할 때에 사람들은 무언가를 찾아낸다.
음악을 듣든 산책을 나가든 친구를 만나든, 그것이 어떤 것이든 무언가를 '한다'.
무언가를 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점 때문에 '심심하다'라는 말은 이미 어떤 것을 향해 손짓을 하고 있다.
심심한 마음이 부르는 손짓을 보고 이리로 온 것들 중에서 '창조와 생산의 힘' 같은 것도 포함되어 있다.

[료하다]
심심함과 외로움 사이에 무료함이 존재한다.
심심함에서 무료함으로, 무료함에서 외로움으로 진행되기 쉽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심심함은 무언가를 향해 손짓하고 있지만, 무료함은 아무 것에도 아직 손짓하지 않는다.
외로움은 그것을 못 견디겠는 어떤 활달한 에너지를 내재하고 있지만,
무료함은 에너지조차 비어있는 상태이다.
무료함이 아무 것에도 손짓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것을 향해 손짓하는 방법을 '이미' 잃어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그러하며,
방법을 잃어버린 그 자리에 '아직' 다른 에너지(이를테면, 외로움이 내재하고 있는 활달한 에너지 같은 것)가 대치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므로, 무료함은 무언가를 빈 입으로 우물거리며, 되새김질한다.

[전하다]
상실감 같은 것. 무엇인가가 있다가 없어진 상태. 혹은 무엇인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 있지 아니한 상태.
그래서 허전함이라는 마음에는 무언가를 다 놓아버린 축 쳐진 손이 달려 있다.
그 손은 근육을 움직여 무언가를 잡으려 하지 않는다.


[허하다]
'무상함'보다는 안절부절한 상태이며, 허탈함보다는 안정된 상태이다.
허전함의 손은 아무 것도 잡으려 하지 않지만,
공허함은 무언가를 잡아보려고 애써 보았던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후회' 같은 것이다.
휘둘렀던 무수한 손들이, 그 에너지들이, 공허함의 배면에는 보인다.
애쓴 흔적이 썰물처럼 쏴, 하며 빠져나가면서 무늬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애써 잡아보려고 마음을 크게 먹었을 때, 그것이 허탕이 되었다고 믿든, 무언가 잡히긴 했든 아니든,
잡긴 잡았는데, 꼭 쥔 손을 펴보았을 때에 그것이 초라해 보이든,
그것이 바로 잡으려던 그 어떤 것이든, 그 모든 손 안에 공허함은 존재한다.
공허함은 '휘둘러보았던' 마음의 손, 그 손의 무수한 경우의 수 안에 언제나 매복해 있다.
그런 점 때문에 '허전함'보다는 좀더 절대적이며, 훨씬 더 철학적으로 빈곤한 상태에 도달해 있다.


[막하다]
'외로움'의 농도가 가장 짙은 상태. 적막함은 상대적이지 않고 절대적이다.
'허전함'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축 쳐진 손을 소유한 마음이라면,
'공허함'이 휘둘렀던 손의 무상함을 응시하는 마음이라면,
'적막함'은 손을 잘라 떼어낸 '몸'이다.
모든 순간, 모든 사물들이 감옥처럼 늘 에워싼다.
그것도 좁은 반경을 그리지 않고, 멀찌감치에서,
황량할 정도의 거리를 두고서. 죽음처럼 싸늘한 온도를 지녔지만,
'적막'은 그것을 순치시키기 위하여 순간순간을 뜨개질한다.
걷는 걸음걸음으로써, 혹은 들이쉬고 내쉬는 한숨 같은 호흡으로써. 그럼으로써 영속된다.
찔레꽃 공주처럼 손을 찔리면서, 피를 낭자하게 흘리면서,
그렇지만 그 아픔과 고통은 인지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의 폐허를 뜨개질하는 숭고한 의식을 치르고 있기 때문에.

[핍]
'공허'와 반대 극점에 있다. 공허와 결핍은 '채워지지 않는다'라는 결론은 같지만, 그 과정이 다르다.
공허는 주체가 스스로 부여한 의미가 움켜진 손 사이로 자꾸만 빠져나가는 모래와 같은 것이라면,
결핍은 그 주체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스스로가 아니라) 그 의미를 자꾸 흘려버리는 것이다.
철 지난 외투의 구멍난 주머니처럼. 혹은, 찾으려는 그것을 조금씩, 한없이, 뒤로 미루어,
채워지지 않는 상태를 지연시키고 있다.
영원한 미래처럼.

[기]
무언가 다른 것을 원하는 상태. '결핍'은 끝끝내 아무 것도 소화하지 못하고 체하지만,
'허기'는 모든 것을 너무 잘 소화하여 결핍된 상태이다.
밑 빠진 독처럼. 눈 앞에 던져진 먹이 앞에서, 바로 이거였어, 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먹어치우지만
너무 빨리 소화를 끝내버렸거나, 다 먹은 후에 이것은 아니었어, 라고 슬프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래서 더 달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결핍'은 결핍된 주체 스스로를 집어삼킬 수 없지만,
'허기'는 허기를 느끼는 주체 스스로를 충분히 집어삼키고도 남는다.
왕성한 소화력. 끝나지 않는 식사. 결핍감은 껌을 씹으며 순간을 모면할 수 있지만,
허기는 고기를 씹는 그 순간에도 포만감이 없다.
'허기'는 마음의 에너지가 마이너스적 과잉 상태에 도달해 있으며,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도달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허기'는 그 무엇보다 궁극적이다.

[화]
진정으로 평화로운 순간은 그리 길지 못하다. 평화는 태풍의 눈이고, 안전지대이다.
그 주변을 에워싸며 휘몰아치는 태풍으로 중무장된. 겨우 쪼그리고 들어앉을 수 있는 마음의 공간.
내가 '평화롭다'고 느낄 때에 그것은 긴장감 없는 상태 중에서 가장 정화된 상태를 칭하는 것이지만,
나를 '평화롭게'하기 위하여 나를 둘러싼 우주는 막강한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평화'는 제 스스로 그 상황을 평화롭게 지속하기 위해서 초긴장의 상태를 견지해내기 때문에, 이내 소진되고 만다.
그러므로, 작디 작은 자극에도 평화는 순식간에 산산조각난다.
그리고 휘발된다. 평화의 지속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평화는 찰나에만 존재한다.
평화 그 이후는, '나태'로 변질되거나, '쓸쓸함'으로 변화된다.
고인 물이 썩듯이, 평화도 썩고야 만다.
'외로움'을 분절시키거나 가시화시키지 않고, 가지런히 돌볼 때 평화가 쉬이 찾아오지만,
그것은 활달한 외로움보다 진실되지 않은, 싸늘히 식은 시체처럼,
부패를 진행시키기 직전의 '잠깐의 안식'일 따름이다.
평화 그 이후는 항상 평화의 직후에 온다.

- 글: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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